REVIEW

산뜻해지고 싶은 시간, 에스프레소 마티니

무턱대고 새로워지고 싶었던 날, 마침 바에 앉아있었다면.

우성 2018년 05월 10일

편견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트렌디’, ‘팬시’ 같은 말에 대한 거부감이었는지도. 한 때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의도적으로 멀리 하고자 했다. 영원히 사랑할 줄 알고 샀던 어떤 물건은 유행이 지나자 시들해졌다. 거짓말처럼 희미해진 사람도 있었다. 술이나 사람이나, 어떤 물건이라도 잠깐인 건 늘 허무했다. 이제 그 정도는 알게 됐으니까, 한동안은 익숙한 걸 몇 번이고 음미하는 재미에 빠져있기도 했다.

“오늘도 그거 드려요? 김렛? 올드패션드?”

첫 잔으로 마시는 술은 대개 정해져 있었다. 편하고 좋았지만 조금은 허무한 태도였는지도 몰랐다. 대체로 만족스러워서, 혹은 그 이상 새로운 걸 추구할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아서였는지도. 내내 머물러있는 느낌 때문에 답답해 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안정과 귀찮음에 대해, 새로움과 실패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혼자서 새로워질 수 없을 땐 도움이 필요했다. 새로운 칵테일 한 잔에도 각오가 필요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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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다른 거 뭐 있을까요? 늘 마시던 거 말고. 얼음 넣고 산뜻하고 강하게 섞은 거 말고. 진이나 위스키 베이스 말고.”
익숙한 것들을 먼저 제거하는 식으로 목록을 줄여나가고 싶었다. 원하는 것 하나 정도는 남겨두고도 싶었다.
“그런데 시원했으면 좋겠어요. 다음 잔을 짙게.”
“그럼, 에스프레소 마티니?”
“그게 뭐예요? 마티니에 커피? 몇 년 전에 되게 유행하지 않았어요?”
“보드카 베이스에 커피, 약간의 단맛, 아주 시원하게. 보드카는 그레이 구스(Grey Goose) 괜찮으시죠? 부드러운 거 좋아하시니까.”

어느 것 하나에도 기대가 없었다. 보드카는 싫어하는 술이었다. 커피를 마시면 좋게 취하다가도 깰 것 같았다. 술이 단 것도 싫었다. 하지만 모험이 필요한 날은 다 내려놓는 편이 좋았다. 누구에게도 까탈스럽고 싶지 않았다. 이것저것 따지고 싶은 날도 아니었다. 습관이 데려가는 길은 뻔하니까, 다 버려두고 내가 믿는 사람의 선의에 의지하고 싶은 날이기도 했다. 바에선 바텐더를 믿어야 옳다. 어떤 새로움은 이런 식으로 시작되기도 한다.

그레이 구스는 프랑스에서 만드는 프리미엄 보드카다. 프랑스 피카디(Picardie) 지방에서 생산하는부드러운 겨울밀로 만든다. 그랑 상파뉴 지역, 지하 150미터 석회석 암반에서 여과된 청정 암반수를 쓴다. 땅과 물이 달라지면 술이 달라진다. 맛과 품질에 이미지와 이야기가 생긴다. 여기에 까다로운 기준과 공정을 더하면 ‘프리미엄’이라는 기꺼이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레이 구스는 매일 5백50가지의 품질 확인 작업을 거쳐 만든다. 이 중 50가지 이상은 40년 이상의 경험을 지닌 전문가, ‘메드르 드 쉐’가 책임진다. 게다가 보기에 산뜻하다. 유난히 예쁘고 낭만적인 병에 투명하고 맑은 보드카가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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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온더락으로 먼저 맛을 보시겠어요?”
“왜요? 달라요?”

보드카에 대한 기억도 좋지 않았다. 무턱대고 섞어 마시다 심한 숙취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숙취였다. 그래봐야 무색, 무미, 무취라고 생각했다.

“조금 다르실 거예요.”

은은한 향이 남아있었다. 입 안에 들어갔을 때의 부드러운 질감, 산뜻한 풍미, 어떤 꽃, 혹은 감귤. 얼음이 조금 더 녹았을 땐 모든 감각이 조금씩 증폭됐다. 모든 맛과 부드러움이 섬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프랑스 어떤 지역의 밀과 물을 쓴다는 설명을 자세히 들었는데, 어쩐지 예쁜 병과 섬세한 맛에 대한 기억만 남았다.

이 즈음, 바 안에 커피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에스프레소 마티니를 위한 커피를 내리는 중이었다.온더락을 마시면서 풀렸던 마음에 테이블 하나, 의자 하나 놓을 정도의 공간이 생긴 것 같았다. 커피를 생존의 도구로 여겼던 건 언제부터였지? 지난 몇 년, 커피는 깨거나 깨어있기 위한 음료였다. 커피 맛이라는 걸 느껴본 순간도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여유였다.

“어떠세요?”

단맛이 싫지 않았던 것도, 보드카를 우아하고 부드럽게 느낀 적도, 커피 향을 느낀 것도 새삼스러웠다. 커피가 달라지면 아주 다른 맛이 되겠지? 얼음이 조금 더 녹으면? 하지만 그대로 마냥 좋아서, 냉기가 사라지기 전에 마시고 싶었다. 누군가의 얇은 피부를 생각하기도 했다. 아주 새로웠지만 아무 것도 낯설지 않았다.

“아주 좋아요.”

위태로울 정도로 얇고 차가운 잔이었다. 식으면서 작은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대로 마지막 모금을 넘겼다. 바에는 아직 커피향이 남아있었다. 에스프레소 마티니로 시작한 밤이었다.

글/ 정우성
사진/ 바카디코리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