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s

[ESSAY] 요가와 퇴사의 상관관계

내가 어떤 상태인지, 나한테 진짜로 필요한 시간은 어떤 모양이어야 하는지를 끝내 알아차린 순간들.

우성 2018년 04월 05일

오후 2시가 되었는데 몸에 피로 한 조각이 없었다. 기자로 살기 시작한 후 11년 동안 이런 컨디션이었던 적이 없었다. 손가락과 발가락, 머리카락 끝까지 감각이 살아있었다. 들숨과 날숨이 다 새로운데다 물 맛까지 예민하게 느껴졌으니까, 차라리 내 몸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거의 콧노래를 부르면서 하늘색 베스파를 타고 한남대교를 건너는 중이었다. 아직 겨울이었는데 추운 줄도 몰랐다. 일찍 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늘 새벽 2시까지는 깨어있는 편이었다.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3시에 자서 8시 반쯤 일어나 12시에 요가원에서 수련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퇴사 후 한 달 정도가 지난 평일 오후의 심정.

돌이켜보면 대학 졸업 전부터 기자였다. 올해로 12년차다. <경향신문> 45기 공채로 입사해 <레이디경향> 기자로 일했다. 입사와 배치 사이에는 ‘사츠마와리’가 있었다. 사회부 경찰 수습기자를 지칭할 때 기자들끼리는 ‘사츠마와리’라는 은어를 쓴다. 4~5개의 경찰서가 있는 구역을 한 명의 기자가 맡아 각각 아침 보고와 밤 보고를 챙기면서 기자로서의 기본을 몸에 익히는 시기였다. 제대로 하자면 가까스로 3시~4시간 정도 잘 수 있었다.

어쩌면 이때부터 평범한 삶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침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무너지면서 피로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GQ"에서 8년, "Esquire"에서 1년 반을 일하면서도 사츠마와리의 감각으로 살았다. 그게 열심히 사는 건 줄 알았다. 피로야말로 열정의 증거라고 여겼다. 잠을 줄이고 무리함으로써 나는 꽤 괜찮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이상한 판타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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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나한테는 혹사의 기준이 있었다. 새벽 1시면 초저녁 같았다. 2시가 한창이었다. 3시면 잘 시간에 가까워졌다고 느꼈고 4시에야 자야한다고 생각했다. 놀기도 많이 놀았고 술도 남 부럽지 않게 마셨다. 그래도 아침엔 8시반~9시 사이에 일어나서 출근했다.

일에 익숙해지면서는 조금 여유가 생기기도 했다. 나중엔 10시 정도에 출근했다. 잠을 조금 더 잘 수 있다고 나아지는 건 별로 없었다. 아침이 짧아지니까 밤이 길어졌다. 길어진 밤을 술과 일과 마감이 채웠다. 그렇게 일상의 효율이 떨어지는 걸 체감하면서도 당연한 줄 알았다. 이름이 제법 알려진 기자로 살게 된 것이 어쩌면 멋인 줄, 때론 그 흔한 젊음인 줄도 알았다. 결과는 만성피로였다. 점점 예민해지는 신경은 무슨 세금 고지서 같았다. 연애와 이별이 제각각 길고 긴 계절이었다.

이름이 알려지고 연봉이 오르면서 삶은 좀 나아지는 듯 했다. 갖고 싶은 것을 갖고 미래를 대비할 수도 있었다. 대신 몸이 망가졌다. 피로가 초래할 수 있는 증상을 고루 겪었다. 가장 괴로운 건 염증이었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겹치면 무릎 관절이 심하게 아팠다. MRI를 찍어봐도 원인을 알 수 없었는데, 조금도 못 움직이는 정도의 통증이었다.

이 증상을 처음 겪었던 밤이 아직도 생생하다. 언젠가의 "GQ" 마감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만 진통제를 12알 정도 먹었다. 그래야 사무실 안에서 절룩절룩 걸어 다닐 정도가 됐다. 가까스로 원고를 쓰고 대지를 수정할 수 있는 정도의 통증을 유지했다. 진통제를 그렇게 많이 먹으면 좀 멍한 상태에서 손까지 떨린다는 걸 그날 사무실에서 처음 알았다.

그 염증이 정수리 언저리에 생기면 두피가 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쏙 그 부분의 머리카락만 사라졌다. 사심없이 신기한 경험이었다. 새벽 3시에 좀 발그스레하게 부어 오르는 걸 후배가 봤는데, 5시에 퇴근해서 3시간 반정도 자고 출근했던 이튿날 아침에는 머리에 작은 구멍이 생겨 있었다. 염증성 원형 탈모였다. 딱 면봉 머리 정도 크기만큼 비어있었다. 4~6주 후에는 거짓말처럼 회복됐다. 피부에 간헐적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두드러기의 원인도 피로와 스트레스였다. 이때부턴 스트레스가 증상을 낳고 증상이 다시 스트레스를 부르는 형국이 되었다.

불면이야말로 당황스러웠다. 잠이 안 온다고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던 시기도 있었다. 스스로 망친 흐름이었다. 리듬이 흐트러지니 살도 찌기 시작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앉아서 생활하니 오후 3시쯤 되면 허리가 뻐근해졌다. 근육량이 줄어드니 관절에 무리가 가기 시작했다. 몸이 보내는 신호였다. 사무실 안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비슷한 증상을 호소했으니, 우리는 통통한 불행으로 연대할 수 있었다. 슬픈데 슬픈 줄도 모르면서, 우리끼리 있으니까 서로 안도하면서, 스스로를 조소하는 경지에는 서로 감탄하면서. 그렇게 밤엔 또 한 잔, 세상 시원하게 웃으면서 취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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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기자로 살아온 대가는 다른 게 아니었다. 짙은 피로와 증상들을 뼛속까지 체화함으로서 한국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었다는 대가 없는 확신이었다. ‘피로’야 말로 내 이름 같았다. 열심히 벌어서 병원비로 탕진한다는 한국 직장인의 굴레 위에 나도 있었다. 영원히 그 굴레를 벗지 못할 거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지만.

“저, 이번 달까지만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했던 아침이 아직도 생생하다. 걱정도, 거리낄 것도 없었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3월이 되면 봄이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거기가 싫어서 떠난다기 보단 다른 길을 걸어야 하니까 벗어나는, 그렇게 가볍고 사뿐한 마음이기도 했다. 하던 일을 끝까지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잡지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를 추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끊어내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확신, 실제로 행동에 옮길 때의 담백한 마음에는 나만 아는 배후세력이 있었다. 그들의 힘으로 나는 한층 더 강해질 수 있었다. 굴레 위에서 좋든 싫든 앞만 보고 달리는 일만이 옳은 게 아니라는 걸 거기서 배웠다. 다른 누가 좋다고 말하니까 마냥 가는 길이 아니라, 내가 좋아야만 기꺼이 가는 길을 발견하고 신뢰하는 방법도. 내 자신이야말로 소중하고, 그래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안아줄 수 있고, 몸과 마음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도 거기서 배웠다.

3년 전 어느날 저녁, 가로수길 어딘가에 있는 요가원에서 고요하게 시작된 일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부드러워서 꺾이지 않는 힘이었다. 나긋해서 거부하기도 어려운 의지였다.

매트 위에서 무수히 알아차린 것들, 어떤 날 수련을 마치고 나도 모르게 흘렸던 눈물, 존경해 마지 않는 우리 선생님들이야말로 나만의 배후 세력이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바탕이었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게 부드럽게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비로소 거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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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대교를 건너 집에 도착했을 때, 친구로부터 온 문자 메시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우성, 잘 지내고 있어? 퇴사 했다는 소식 좀 늦게 들었어. 그 용기가 정말 부러워. 응원할게!”

베스파를 세워두고 서서 답장을 보내기 전에 오래 생각했다. ‘용기’라는 말이 낯설어서였다. 나는 용기를 낸 것이 아니었다. 내 마음이 건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을 알게 된 것뿐이었다. 그 이야기를 답장에 쓰려다 말았다. 대신 말했다. “고마워! 곧 만나, 우리 맛있는 거 같이 먹자!”

나는 한껏 개운해진 몸을 한 번 더 펼쳐냈다. 땀으로 푹 젖어있는 요가복 상의와 하의를 세탁기에 넣어뒀다. 내 몸과 마음에는 한 치의 의구심도 없었다. 다음 수련을 기대하면서, 오늘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글/ 정우성
그림/ 이크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