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술과 기분] #12. 내겐 단 한 병의 술, 맥켈란 18년

제일 좋아하는 술 한가지를 꼽으라면, 긴 고민 끝에 이 술을 고를 것 같다.

더파크 2020년 01월 31일

아직도 라꾸쁘에 와서 “양주 있어요?”라고 묻는 젊은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괜찮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위스키는 아마도 이렇게 구분돼 있을 확률이 높다. 내 등 뒤에 줄지어 있는 싱글 몰트위스키는 ‘위스키’, 이 바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그간 많이 봐왔던 잭다니엘, 시바스 리갈, 조니워커 등은 ‘양주’. 실수를 가볍게 교정해줬더니 머쓱하게 웃는다. 사실 나도 같은 실수를 아직까지 반복한다. 소주와 맥주로 이어지는 걸쭉한 모임 자리에 나가서 “3차는 양주 마시자 양주”라고 하거나 “야, 오늘은 양주 삘인데?” 같은 말을 하는 식이다. 좀 더 캐주얼한 술자리에서 위스키는 종종, 나도 모르게, 양주라는 단어로 교체된다. 위스키라고 명명하면 어딘지 좀 딱딱해지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위스키라는 말을 ‘싱글 몰트위스키’로 좁혀 부르기 시작한 건 에디터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그걸 다시 싱글 그레인 위스키, 블렌디드 몰트, 블렌디드 그레인 등과 정확히 구분을 지어 이해하기 시작한 건 또 한참 시간이 지났을 때다. 싱글 몰트위스키를 보리부터 병입까지 차근차근 익혀가며 처음으로 알게 된 싱글 몰트위스키 브랜드가 무엇인지 나는 확실하게 기억한다. 바로 맥캘란. 막캘란인지 멕캘란인지 읽는 법도 표기법도 어색했던 그 브랜드의 알 듯 말 듯한 끄트머리를 붙잡고 나는 싱글 몰트위스키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었던 것 같다. 당시 수입되는 싱글 몰트위스키의 브랜드는 두 손에 꼽을 정도로 제한적이었는데 그 중 맥캘란은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잡지 독자들과 소통했던 브랜드였다. 태어나자마자 눈 앞에 보이는 고양이를 두고 엄마라고 여기는 병아리가 된 것 마냥 나는 자연스럽게 맥캘란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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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도 맥캘란은 나에게 많은 ‘처음’을 선사했다. 숙성년도 별로 위스키의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맥캘란 12년, 15년, 18년을 마시며 체득했다. 맥캘란 증류소의 사진을 보면서 증류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처음 봤고, 셰리 캐스크에 숙성한 위스키가 어떤 향을 뿜는지도 맥캘란을 통해 처음 공부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맥캘란이 어떤 신제품을 내는지, 어떤 제품을 단종시키는지, 어떻게 제품을 비싸게 파는지, 어떻게 특별한 제품을 더 특별하게 포장하는지를 봤고, 위스키 업계의 변화를 맥캘란과 함께 목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인생 첫 ‘럭키드로우’ 당첨도 맥캘란을 통해 경험했다. 11년 전쯤, 당시 참석한 행사에서 럭키드로우 최고의 부상은 맥캘란 30년이었고 나는 이름이 호명되자 어쩔 줄 몰라 연신 굽신거리며 그 술을 받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당시 백화점 판매가가 150만원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다 생각이나 찾아보니 최근엔 750만원을 상회하는 것으로 나온다. 놀랍지 않다. 지난 11년 간 맥캘란 30년의 가격을 찾아볼 때마다 가격은 여지없이 조금씩 더 올랐다. 때때로 맥캘란 30년의 가격을 검색하는 소일거리를 하며 맥캘란 18년을 조금씩 홀짝였다. 그때 그 맥캘란 30년은 지금 내 손 안에 없다. 그 기구한 이야기를 하기에 지금 이 지면은 한없이 비좁다.

가끔씩 떠오르는 맥캘란 30년의 추억은 씁쓸하지만, 가장 손이 잘 닿는 곳에 두고 마시는 맥캘란 18년은 늘 황홀하다. 내가 인식하는 ‘위스키 향’이라는 단어는 맥캘란 18년의 향에 가장 가깝다. 꾸덕꾸덕한 말린 과일의 향기, 계피와 자작나무를 함께 태운 듯한 향기, 바닐라에 생강 시럽을 끼얹은 듯한 향기 등이 질세라 우르르 피어오른다. 초정처럼 진한 색깔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화려하게 리뉴얼을 마친 맥캘란 증류소를 방문해본 적이 있는데, 디즈니랜드를 처음 가본 어린아이처럼, 별안간 탭댄스를 추고 싶을 정도로 신이 났다. 투어가이드가 설명을 하면 증류소 곳곳에 조명이 켜지고, 가이드의 지휘에 맞춰 음악까지 흘러나와 기어이 내 턱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맥캘란이 최고의 싱글 몰트위스키 증류소라고 단언할 순 없지만, 나에게는 오랜 시간 가장 진한 기억을 꾸준하게 쌓아온 고향친구 같은 증류소다.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았지만, 온갖 종류의 술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술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작지만 명확한 목소리로 맥캘란 18년을 꼽겠다. 좋아하는 술에 추억까지 엉겨 있으면 그 한 잔의 가치는 750만원 따위의 수치로 측정할 수가 없다. 술을 마시며 기억을 곱씹고 그 때의 기분을 소환하는 이 칼럼을 쓸 때마다 술이 가득한 궤짝 위에 앉은 것처럼 행복했던 이유다.

글, 사진 / 손기은(칼럼니스트, 라꾸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