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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기분] #11. 화사한 진

온갖 종류의 술을 두서없이 좋아하지만, 가장 ‘화사한 술’을 꼽으라고 한다면 무조건 진(Gin)이다.

더파크 2020년 01월 17일

대학 졸업 후, 세상이 궁금한만큼 온갖 술이 다 궁금했다. 소주와 맥주가 아니라면 전부 다 마셔보고 싶었다. 데킬라를 처음 마시고 호사로운 사회인이 된 기분도, 위스키를 홀짝 마시곤 어쩐지 어른이 된 기분도 느꼈다. 그 시절 즈음, 포털 사이트에 ‘진 마시는 법’을 검색해보던 날도 있었다. 당시 나에게 진은 칵테일로 만들어 먹는 술, 그냥 마시면 타락한 뒷골목 영국인이 된 것처럼 인생 망치고 마는 술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보드카는 긴 털모자를 눌러쓴 러시아인들이 마시는 호방한 맛이라도 있어 보였는데, 도대체 진은 어떤 맛으로 먹는 술인지 알 길이 없었다. 깔루아 밀크,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갓파더 등을 파는 학교 앞 술집에서 진토닉을 마셔봤지만, 이 맛의 어느 부분이 진이고, 어느 부분이 토닉인지 당시의 짧은 경험치로는 알 턱이 없었다.

일을 시작하면서, 궁금했던 술의 퍼즐을 하나씩 풀어나가면서 진의 정체도 알게 됐지만 내 ‘술방’에 이 술을 들이지는 못했다. 역시나 어떻게 이 술을 혼자서 그럴싸하게 즐기는 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즈음 서울의 내로라하는 술집에서는 ‘몽키47’ 진이 크게 유행했다. 세련된 술 애호가들은 이 진을 병채로 주문해 마시고는 쌍 엄지를 날리며 도시인의 쾌락을 즐기는 듯한 표정을 많이 지었는데, 난 그 앞에서 물음표만 입에 꾹 물고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위스키, 그라빠, 럼, 포트 와인도 다 차별없이 좋아했으면서 왜 진 앞에서는 부끄러운 전학생처럼 슬금슬금 뒤로 숨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진을 있는 그대로 좋아하게 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런던 출장길에 사온 진 한 병이 물꼬를 텄다. 만석이다 못해 사람들이 길 가로 삐져 나와 술을 마시는 술집들이 즐비한 골목에 있는 어느 보틀숍에서 구입한 진이었다. “몽키47 진이 한국에서 아주 유행인데 그것보다 더 맛있는, 그 진보다 더 핫한 진을 추천해줄래?” 동묘시장에서 팔 것 같은 꽃무늬 카디건을 소호 디자이너 프라이빗 컬렉션처럼 소화한 보틀숍 직원이 추천해준 진은 독일에서 만든 퍼디난드(Ferdinand)였다. “보태니컬(Botanical)을 잔뜩 집어넣은 진이야. 엄청 화려하고 화사해.” 그때 잠깐 맛본 그 진은 설명대로 화사했다. 살짝 콧구멍을 대니 꽃다발(허브가 많이 섞인)을 스프레이로 만들어 얼굴 주변에 뿌린 것처럼 향이 마구 퍼졌다. 첫 모금에선 알코올이 턱을 슬쩍 치고 올라왔지만 두번째부턴 스프레이가 제대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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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이거 정말 끝내주는구만!”

점잖고 묵직한 런던 드라이진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진 베이스 칵테일에는 다른 향과 맛을 묵직하게 받쳐주는 드라이진 스타일이 최적일 테다. 하지만 내 요즘 눈에는 카모마일, 고수, 로즈힙, 주니퍼베리, 펜넬, 계피, 생강, 애플민트 같은 보태니컬을 잔뜩 집어넣은, 그래서 가격도 웬만한 싱글 몰트위스키만큼 비싼 진만이 아이돌처럼 빛난다. 요즘은 국내에서도 트렌디하고 힙한 크래프트 진이 많이 수입되지만, 나 같은 홈술족이 소매로 구입할 수 있는 종류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요즘 해외에 나가면 제일 팬시해보이는 보틀숍에 들러 “보태니컬 때려 넣은 진 좀 추천해줄래?”를 외친다. “보태니컬 몇 개 들어갔어?”라고 물으면 좀 더 쾌속으로 진 쇼핑을 할 수 있다.

물론 보태니컬만 많이 넣고 균형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큰머리 인형 같은 진이 걸릴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화사하고 흥미롭다. 그렇게 구해온 진에 얼음을 넣고 천천히 녹여가며 마신다. 비오니에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와인도 꽃 향기가 와락 달려드는 화사한 술이지만, 진이 훨씬 즉각적이고 경쾌하고 힘이 좋다. 특히 히터 바람에 목구멍부터 손가락 끝까지 건조하게 느껴지는 겨울이야말로 온갖 허브 향과 꽃 향이 뒤섞이는 진이 제격이다. 오이를 반으로 쪼갰을 때처럼, 오렌지 껍질을 손으로 벗길 때처럼 분사되는 화사함이 아찔할 정도다. 진을 마실 땐 이상하게 다른 술을 마실 때보다 내 모습이 더 근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유는 모른다. 오로지 내 기분만이 근거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