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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기분] #9. 노르망디의 술

프랑스 노르망디에는 딱 한번 가봤다. 하지만 고향처럼 늘 그립다.

더파크 2019년 11월 29일

나고 자란 곳이 경상남도 창원일지라도, 늘 서울 애들보다 앞서 나가고 싶었다. 서울의 최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가 잡지와 PC통신뿐이었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지방 출신’이 누명처럼 억울했다. 이대 앞 골목길 지도, 홍대 앞 보물찾기 지도 같은 잡지 부록이 나오면 냉큼 사서 ‘수학의 정석’처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다. 내년이면 ‘지방 학생’으로 산 세월과 ‘서울 사람’으로 산 세월이 정확히 같아지는 나이가 된다. 그러니 이제 정말 서울 사람이 다 됐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택시 타면 기사보다 내가 길을 더 잘 알 때도 있을 정돈데?

술주정도 서울말로 하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다른 도시에 대한 동경은 어릴 때처럼 가득하다. 털모자를 눌러쓰고도, 외투를 몇 겹씩 대충 툭툭 껴입어도 그 자체로 멋있는 사람들이 가득한 코펜하겐에 꼭 가보고 싶었는데, 얼마 전에 그 꿈을 이뤘다. 프랑스 리옹과 포르투갈 마데이라, 노르웨이 오슬로와 에스토니아 탈린과 이탈리아 모데나…. 아직도 못 가본 도시들이 못 다 이룬 꿈처럼 매일 미련의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틈만 나면 ‘스카이 스캐너’ 앱을 켜서 이 도시까지 가는 항공편을 검색한다. 스텝이 완전히 꼬인 모양새로 복잡한 환승을 거쳐야 하는 루트지만, 갈수만 있다면 1시간 만에 짐을 챙겨 집을 나설 설레발이 언제나 준비돼 있다. 이 위시리스트의 가장 꼭대기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도시가 하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지역이다. 프랑스 노르망디. 이 도시에 대해선 뭐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깔바도스쇼’부터 시작해본다.

노르망디 지역의 에트르타는 5년 전, 일주일간 파리를 여행할 때 당일치기로 다녀온 도시다. ‘파리 근교 여행’쯤으로 검색한 뒤 무려 고속버스를 타고 찾아갔다. 겨울 초입이라 그 유명한 흰 절벽과 바닷가 풍경은 좀 황량했고, 인상파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는 부서지는 빛은 충분히 따뜻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좀 시려서 찾아간 큰 길가 카페에서 나는 ‘칼바도스 쇼’라고 적힌 술을 주문했다. 쇼콜라 쇼에 칼바도스를 넣은 것 아닐까, 라는 기대로 기다렸는데, 이름 그대로 정말 ‘핫 칼바도스’, 데운 칼바도스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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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도스는 노르망디의 특산주인 사과 증류주다. 도수가 위스키처럼 높다. 그 술을 데웠으니 증발하는 알코올을 조심했어야 하는데, 겁도 없이 코를 갖다 댔다가 코 점막이 찢어질 뻔한 기억이 있다. 펀치를 얻어맞고 잠깐 뒤로 나자빠졌다가 적당히 식은 칼바도스를 다시 마셨다.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따뜻함이 전해졌다. 들쩍지근하지 않은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뒷맛은 산뜻하고 말끔했다. 턱 밑을 자꾸 건드리는 풍성한 향 때문에 작은 술잔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그때 이후 한동안 칼바도스를 편애했다. 일본 교토에 칼바도스만 취급하는 바가 있다는 소식에 교토 비행기 표를 단박에 예매했다. 최근 국내에도 수입이 시작됐지만, 당시만 해도 해외에 가야 볼 수 있었던 크리스천 드루앵의 칼바도스도 트렁크에 보물단지 모시듯 싸서 왔다. 25년 오크 숙성한 귀한 술이라서 매일 밤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마셨다. 그간 바에서 본 건 많아서, 납작하고 둥그런 잔에 칼바도스를 붓고 티 캔들 홀더 위에 잔을 올려 데워 마셨다.

칼바도스의 향기를 떠올리면 에트르타의 차가웠던 바닷바람이 생각나듯, 초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리면 어디선가 칼바도스의 향기가 함께 불어온다. 이 기분에 영화 <르 아브르>를 끼얹으면 ‘노르망디 가고 싶어 병’이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된다. <르 아브르>는 노르망디 항구도시의 이름으로 귀여운 주인공과 동화 같은 이야기와 르 아브르의 풍경이 연극처럼 펼쳐지는 영화다. 다른 무엇보다 구두닦이인 주인공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매번 찾는 동네의 작은 바의 모습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는다. 이 바의 분위기와 작은 잔, 화이트 와인, 올리브 세 알 같은 것이 너무 좋아 실은 내가 운영하는 바의 이름이 ‘라 꾸쁘’가 아닌 ‘르 아브르’가 될 뻔했다. 얌전하게 마시는 술 한 잔으로 하루 일과를 정리하는 삶이야 말로 늘 동경해온 터라, 이 영화를 본 이후, 두어 달 길게 살아보고 싶은 도시를 꼽을 때마다 노르망디의 르 아브르를 1순위로 떠올린다.

현실은 서울이지만 칼바도스 한잔이면 노르망디의 발톱 근처 정도까지는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은 칼바도스를 작은 잔에 따라 마신다. 아, 여행용 소형 화장품병에 칼바도스 30ml 정도를 넣어서 휴대해야겠다. 핫초코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해 이 칼바도스를 넣어야지. 벙어리장갑을 끼고 방울 달린 털모자를 쓰는 겨울 낭만은 내 것이 아니지만, 센 술 콸콸 부어 넣은 따뜻한 음료 한 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겨울 낭만 그 자체니까.

글, 사진/ 손기은(프리랜스 에디터, '라꾸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