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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기분] #8. 낮술 샴페인

평범한 날 오후 두 시에 마시는 샴페인의 참 맛.

더파크 2019년 11월 22일

“언제 좋은 샴페인을 따고 싶은가?”라고 물었을 때, 샴페인 하우스의 양조 담당자들은 하나같이 “지금” 혹은 “아무 날도 아닐 때” 혹은 “매일” 같은 답을 했다. 샴페인이 특별한 날에만 소비되는 것을 온 몸으로 막아보려는 듯이. “샴페인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오해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담당자들은 주로 “샴페인도 와인이다. 일반 와인처럼 맛과 향을 즐기는 술이다”라고 답했다. 흔들어서 머리에 뿌리고, 뻥 따서 허공에 날리는 용도로 쓰이는 것을 손사래 치며 막아보려는 듯이.

내로라하는 샴페인 하우스의 전문가들이 샴페인의 ‘빵빠레’ 이미지를 벗으려고 부던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그 이미지가 얼마나 강력한지 역설적으로 알게 된다. 연말에 샴페인 판매량이 확 치솟는 것을 볼 때마다, 그리고 생일에는 꼭 좋은 샴페인을 하나씩 따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마다, 샴페인의 ‘페스티브’한 이미지가 얼마나 견고한지 다시금 확인한다. 축하할 건수가 잡힌 날, 와인 장터에서 사둔 비싼 샴페인을 셀러에서 꺼내 사람들과 나눠 마실 때면 머릿속에 늘 한 장면이 콕 박혀 떨어지지 않는다.

개츠비로 분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쿠프 글라스의 스템을 검지와 약지 사이에 끼우고, 얼굴에 거만한 주름을 만들어가며, “마셔”가 들리는 듯한 표정을 짓는 스틸 사진 한 컷. 흩날리는 꽃가루가 보이고 음악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그 장면을 무한반복으로 ‘상상 영사’하면서 샴페인 잔을 들어올리면 정말로 쾌감이 솟는다. 그 맛이 최고의 안주가 된다. 그 때의 기분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기 위해 한 때는 비싼 플루트 잔을 사 모은 적도 있다. 없는 돈을 끌어 모아 바카라와 생루이 매장에서 샴페인 플루트를 굳이 한 개씩만 사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관계가 서서히 옅어지고, 살면서 생각보다 축하할 일이 별로 없고, 의외로 인생에 흥보다 화가 더 많아지면서 샴페인은 장롱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철 지난 코트 신세로 떨어졌다. ‘뭐더러’라는 인생 철학을 내세우며 샴페인보단 화이트 와인을 많이 마시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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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얼마 전, 낮술로 샴페인 다섯 잔을 연거푸 마신 일을 계기로 생각이 바뀌었다. 아니, 잊고 있었던 재미가 생각났다는 표현이 더 옳다. 그날은 오랜만에 오전에 시작하는 브랜드의 행사장을 찾았다. 서브해준 샴페인의 온도가 기가 막혔다. 겨울날 풀 먹인 두꺼운 이불 속에 처음 들어갈 때의 그 온도처럼 차갑지만 포근했다. 즉각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꽃 향을 뿜어내는 모엣 샹동 브뤼 한 잔을 마시고 입맛을 다시고 또 한 잔을 마시고 혀를 굴렸다. 어느새 비어 버린 잔을 보며 멋쩍게 웃으면 누군가 와서 잔을 채웠다. 아무 날도 아닌데, 심지어 무방비 상태인 빈 속에 쏟아 부은 샴페인이 생일날의 벼르고 벼른 한 잔보다 더 빛났다. 그날 이후로 아무 날도, 그 무엇도 아닌, 대낮에 마신 샴페인에 대한 기억이 봉인 해제되기 시작했다. 이미 숱하게 경험해왔지만, 샴페인의 그 ‘잔치상 무드’에 가려 잊혔던…

행사장의 ‘웰컴 드링크’ 샴페인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최고의 낮술이다. 주는대로 반을 비우는 바람에 오후 2시에 취기가 이미 밤 12시처럼 농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잔 속에서 터지던 샴페인 기포가 관자놀이로 옮겨와 자잘한 두통이 이어져도 기분만큼은 ‘이 구역의 왕’이 됐던 순간들이랄까. 그 기분을 이끌고 평양냉면집을 찾아가 기어이 2차 낮술을 마시다 반차를 쓸 수밖에 없었던 상황으로 이어진 적도 있다. 숙취로 고생하던 어떤 일요일엔 냉장고에 넣어둔 샴페인을 발견하곤 해장술을 시작한 일도 기억이 난다. 몰려오는 갈증을 샴페인이 깔끔하게 해소해줄 거라고 믿었다. 반 병을 비울 때까진 정말로 개운함에 온몸이 상쾌했다. 프랑스 여행 중에 방문한 상파뉴의 한 호텔에선 목욕을 하며 로제 샴페인을 마신 적이 있다. 체크인 후 저녁 식사 예약 시간까지 여유가 생겨 가볍게 시작한 낮술 샴페인이었는데, 마릴린 먼로가 살아 돌아온대도 뭐 하나 꿀릴 것 없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난다. 어떤 날은 애인과 소파에 들러붙어 있다 갑자기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대충 김밥을 싼 뒤 샴페인 하나만 챙겨 피크닉을 간 적도 있다. 스테인리스 캠핑 머그컵에 따라 마신 샴페인이었지만 크리스탈 플루트 잔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코펜하겐이고, 시간은 밤 12시 반이다. 내일 아침 8시 반엔 구글맵에 별표해둔 베이커리를 찾아 모닝 샴페인을 마실 작정이다. 메뉴판 가장 마지막에 샴페인이 있는 걸 확인했다. 조깅복을 입고 샴페인을 마실 생각에 벌써부터 흥이 차오른다.

글, 사진/ 손기은(프리랜스 에디터, ‘라꾸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