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기분] #8. 겨울의 흑맥주

눈이 오면 생각나는 맥주와 사람이 있다.

더파크 2019년 11월 08일

비가 올 때 자동반사적으로 파전과 막걸리의 페어링이 곧장 떠오르는 한국의 문화는, 생각해보면 사실 엄청나다. 장마철의 연간 강수일이 15일 정도인 것을 생각해보면, 막걸리와 파전은 강력한 홍보효과를 특정 기간에 15일 이상 누리고 보고 있다는 뜻이다. 연간 강수량이 1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영국이 우리와 같은 날씨 페어링이 있었다면 막걸리와 파전은 진앤토닉 만큼이나 잘 팔리는 조합이 되었을 지도…. 물론 햇빛이 내리 쬐는 날씨에 로제 와인이 더오른다거나, 엉덩이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날에 고기 기름 둥둥 뜬 스튜가 생각나는 건 있겠지만, 그래도, 정말로, 막걸리와 파전만큼 후각, 시각, 미각을 즉각적으로 후벼파는 경우는 드물다는 생각을 매번 한다.

개인적으로는 막걸리와 파전만큼이나 강력하게, 날씨에 영향을 받아 ‘리콜’되는 음식이 하나 있다. 단풍이 딱 지금처럼 예쁘게 들기 시작할 때마다, 울긋불긋 단풍잎이 가을 햇살을 반사해낼 때마다 생각나는 그 음식은 ‘노란 콩잎 김치’라고도 부르는 ‘단풍 콩잎 김치’다. 경상도 지방의 삭힌 콩잎 요리인데, 실제로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콩잎을 따서 만드는 밑반찬이다. 어렸을 때 단풍놀이를 가면 엄마는 진담에 가까운 농담조로 “노란 콩잎이랑 흰 밥 싸올 걸” 읊조렸는데, 매해 그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제는 단풍만 봐도 쿰쿰하고 질깃한 삭힌 콩잎의 맛이 바람을 타고 코 끝을 스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올해는 단풍을 보고 콩잎을 떠올릴 여유조차 없이 부산한 가을을 지나왔고, 엄마는 얼마나 많은 콩잎을 드셨으려나, 생각해보는 찰나를 끝으로 가을의 콩잎을 떠나보냈다. 가을이 꼬리를 보일 때쯤부터, 날씨와 함께 머릿속에 강력하게 엮어 들어오는 음식이 하나 더 있다. 흑맥주다. 아침에 현관문 사이로 얼굴을 때리는 바람의 온도가 0.5도씩 떨어지는 게 느껴질 때부터 흑맥주 타령은 시작되고, 흰 눈이 펄렁펄렁 내려 어느새 묵직하게 쌓인 장면을 볼 때 절정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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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기한 만료된 애인과의 추억을 자꾸만 기록하는 일이 좀 미안할 때가 있지만, 헤어진 애인들이 내 글을 전혀 찾아볼 것 같진 않아 쓰는 기억 하나. 쌓인 눈과 흑맥주의 조합을 이야기할 땐 애인과 설악산 여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마주본 눈 덮인 설악산의 압도적인 병풍 풍경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워낙 즉흥 여행을 ‘진정한 자유’라고 착각하고 지냈던 둘이어서, 그 날도 폭설 예보를 누구도 체크하지 못하고 강원도로 차를 내달렸다. 덮쳐오는 쓰나미를 등지고 도망가는 재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가까스로 숙소에 도착했고 불빛 하나 없어 검게 닫힌 창 밖을 보지도 않고 위스키니 와인이니 잔뜩 마시며 웃었다. 그리고 다음날 눈을 떴는데, 지나간 사춘기 감수성도 터져 나오게 만들 정도로 온통 흰색으로 변한 설악산 자락이 전자제품 대리점의 대형 TV 속 한 장면처럼 창밖에 펼쳐져 있었다. 황태해장국을 먹으러가던 길에는 설악산을 빙 두르는 느낌으로 운전을 했는데, 파노라마가 이런 것일까, 스위스를 왜 가나, ‘장관이네요, 절경이네요’, 눈물이 나는 것 같다, 이 길만 하루종일 달리고 싶다 등 온갖 주접과 상찬을 풍경 앞에 쏟아냈다. 그러고는 둘 다 단 하나의 술, 흑맥주가 마시고 싶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편의점의 기네스라도, 코젤 다크라도 수혈받고 싶어 안달이 났다. 입술에 차갑게 닿지만 탄산감은 거의 없고, 화사한 홉 향 보다는 커피 향과 초콜릿 향이 더 많이 나는 흑맥주야 말로 ‘눈 병풍’ 앞에서 마시기 위해 만들어진 술처럼 느껴졌다. 포터건, 라거건 흑맥주 스타일이 무엇인지보다는 그 짙은 색과 향이 새하얀 눈과 짜릿한 대비를 이루는 게 좋았다. 눈과 흑맥주 때문에 이 즉흥 여행은 계획보다 훨씬 더 길어질 수밖에 없었고 예상(예산)보다 훨씬 더 많이 마시고 돌아왔다.

지금 애인은 없지만 겨울은 여지없이 다가올 것이고 다행히 나는 강력하고 묵직한 흑맥주를 더 많이 알고 있다. 주워 먹을 땅콩조차 생각나지 않는 꽉 차는 발틱 포터 한잔이면 겨울은 이미 충만하다. 도수가 높고 단맛과 쓴맛이 모두 강해 와인 잔에 이 술을 붓고는 한시간에 걸쳐 나눠 마셔야 한다. 밤을 길게 보내는, 그야 말로 겨울의 맛. 어느새 내려 쌓인 한밤의 눈 맛. 기설제를 지내는 마음으로 오늘도 이 술을 마신다. “눈 오니까 흑맥주 한잔?” 하는 느끼하고 다부진 새 애인도 같이 오기를.

글, 사진/ 손기은(프리랜스 에디터, 라꾸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