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술과 기분] #7. 양주의 맛

로얄살루트 21년의 병목을 잡는 순간, 향이 터지는 순간, 입 안에서 굴려보는 그토록 선명한 순간.

더파크 2019년 10월 18일

드라마 속 대저택의 휑한 거실, 가운을 입고 너덜너덜한 표정을 한 중년의 주인공이 마시는 술은 열에 여덟이 로얄살루트 21년이다. 수년 전 누군가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방송국 소품실에 로얄살루트 21년만 있는 거 아니냐고. 병 안이 안 보여서 촬영하기 쉬워서 그런 것이냐고. 나름 화려한 음각 문양과 위스키 디캔터 모양의 병 디자인이 번쩍번쩍 광이 나는 수입 원목 가구 인테리어와 찰떡이라 그렇지 않겠냐고. 그때까지만 해도 속으로 웃었다. 재벌집이라면 맥캘란 파인 앤 레어 정도 마셔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하지만 아무리 드라마 속 주인공이라도 남의 속은 내가 헤아릴 수 있는 게 아니고, 위스키 취향엔 기준도 잣대도 없다는 걸 시간이 빠르게 굴러갈수록 더 진하게 깨달았다.

로얄살루트 21년은 내 마음속 ‘오늘 마시고 싶은 술’ 상위에 자주 랭크되는 블렌디드 위스키다. 늘 미디어 대상 이벤트를 화려하고 정성스럽게 하는 브랜드라서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 더 부풀었을 수는 있지만, 이 위스키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된 여러 요인은 사실 모두 집에서 발견했다.

어쩐지 한숨만 푹푹 나는 밤, 그게 뭔지도 모르지만 왠지 속세에 찌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밤이었다. 찬장 한쪽 구석에 그림자처럼 자리 잡은 로얄살루트 병을 한 손으로 턱 잡았다. 작은 잔을 꺼내고 병목을 한 손으로 감아쥐고 술을 따르니, 식용유병처럼 통통하고 길쭉한 위스키 병으로 술을 따를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 피어올랐다. 주막 평상에 털썩 주저앉아 모주 한잔 따르는 기분이라면 우스울까? 남들 다 즐거운 노래방에서 씁쓸하게 웃으며 혼자 맥주 한잔 따르는 싸이월드 감성이라면 너무 나간 걸까? 이 세상에 나를 아는 사람은 나뿐이고 나를 위로해주는 건 양주 뿐이라는 느낌으로 ‘자작’할 수밖에 없는 목이 길고 아래가 둥근 형태의 로얄살루트 병이 그때부터 달리 보였다. 한번 잡고 따라보면 안다. 그 얼큰한 외로움의 느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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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는 좀 고상한 찬사다. 로얄살루트를 다시 보게 된 건, 한잔 따른 뒤 머리맡에 놓고 책을 보다 꾸벅꾸벅 졸던 어느 날 밤의 경험 때문이다. 잔에 따를 때부터 향수병 뚜껑을 연 것처럼 즉각적으로 달콤하고 시원한 과일 향이 확 퍼지는데, 이 한잔을 머리맡에 두고 홀짝이니 정말 디퓨저를 갖다 놓은 것처럼 방안이 위스키 향으로 가득 찼다. 오렌지 껍질을 손톱과 손을 이용해 열심히 까고 난 뒤 손바닥에서 나는 향기, 나무향과 스카치 캔디향이 마구 뒤섞이는 듯한 진득한 향기, 계피가루에 한 번 굴린 달달한 건자두가 쿡 박힌 갓 구운 파운드케이크의 향기가 머리부터 발 끝까지 나른하게 퍼졌다.

코에서 느껴지는 향기만큼이나 입 안에서 굴러가는 위스키의 기운도 말랑하고 부드러운 편이라 한잔 마시고 바로 잠드는 나이트 캡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 이후부터 나는 자기 전에 위스키 한잔을 마시다가 적당히 남긴 뒤 그 향에 취해 잠드는 걸 즐기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희미하게 위스키 향기가 느껴지면, 이렇게까지 하는 나 자신이 좀 웃길 때도 있지만 그 엷은 향에도 기분이 둥글어지는 것만은 확실하다.

라꾸쁘에서 진행하는 위스키 초심자 원데이 클래스에서도 이 디퓨저 경험은 늘 큰 호응을 불러일으킨다. 집에서 바로 실천해보는 사람들의 손뼉 소리가 들리는 듯한 후기를 전해 들을 때면 위스키는 정말 ‘향의 술’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 깨닫는다. 어제는 손님이 주문한 위스키를 따르다가 나도 모르게 “어우, 향이”라는 말을 밖으로 내뱉아버렸고, 손님과 나는 소주잔을 부딪힌 사람처럼 걸쭉하게 웃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잠깐 위스키 한잔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는데 어우, 향이….

글, 사진 / 손기은(프리랜스 에디터, ‘라꾸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