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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기분] #6. 내 맘 편한 로제

로제 와인의 이름은 금방 외울 수 있을 것 같다. 나한테는 옆 반 친구 같은 와인.

우성 2019년 10월 04일

불현듯 술 생각이 나면 선택지를 넓게 펼쳐 놓고 그날의 기분, 컨디션, 날씨, 사람에 따라 주종 하나를 고르는 편이다. 가장 중요한 건 기분이고, 늘 무시하고 마는 것은 내일의 스케줄이다. 하지만 맥주부터 전통주까지, 각종 술 종류를 다양하게 갖춰 둔 바는 서울에 생각보다 많지 않다. 원하는 술은 손에 잡히지 않는 곳에 있기 일쑤였다. 작은 방 하나를 헐어 내 마음대로 ‘바’라고 부르며 어설프게나마 여러 종류의 술을 갖추기 시작한 것도 온갖 종류의 술이 시도때도 없이 떠오르는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그 방에 와인은 몇 병 없다. 10년 넘게 숙성해야 하는 좋은 와인 몇 병만 셀러에 잠들어 있다. 와인은 나에게, 열정적으로 들여다보지 않는 술 선택지 중 하나다. 일단 고려해야 할 리스트가 (체감하기에) 너무 길고, 레이블이 머릿속에 바로바로 떠오르지 않으며, 늘 예기치 않을 때 취기가 확 몰려오는 술이라서다. 창고형 와인 아울렛에 가면 일단 ‘두둠칫’ 신나는 마음이 일다가도 이내 박자가 꼬인 춤처럼 헤매고 만다.

맨 정신으로 고백하건대, 가장 맛있었던 와인은 와이너리에서 그곳의 오너와 함께 마신 점심 식사 자리의 와인(고를 필요 없음), 와인전문가가 참석한 홈파티에서 마신 와인(맛부터 스토리까지 모두 훌륭한 좋은 와인을 알아서 가져옴), 힙한 레스토랑에서 다소 건들건들한 소믈리에가 추천해주는 와인(일단 한번 마셔봐 느낌으로 한 병 투척함) 등이다. 고민의 시간은 짧고, 추천이 좌로 우로 번지는 것 하나 없이 선명한 경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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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 와인에 대해 기사를 쓸 땐 보통 이런 말들을 앞뒤로 자주 붙여왔다. “색깔만 보고 로맨틱, 러블리를 떠올렸다면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고추장 앙념에도, 스테이크에도 맞붙는 박력있는 와인이니까.” 혹은 이런 설명. “아직 우리나라에는 많이 수입되고 있지 않지만, 유럽에서 로제의 인기는 상당하다. 와인 매대의 1/3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또 이런 말들. “태양이 쏟아지는 남 프랑스의 느낌을 떠올리며 낮술로 즐기는 로제 와인. 반쯤 얼려 마시는 프로제(Frosé)도 몇 해 전에 여름 음료로 큰 인기를 끌었다.”

로제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나만의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것이다. ‘선택지가 단출해서.’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가 가늠이 되고, 매대 위에 올려진 로제도 한 줄 정도로 가뿐하고, 그래서 오히려 이런저런 레이블을 시도해볼 맛이 난달까? 물론 해가 갈수록 로제 와인 수입이 늘어나서 이마저도 옛날 이야기가 됐지만, 와인 앞에서 발현되는 게으름과 두려움이야말로 로제를 즐겨 마시기 시작한 동력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프랑스 파리 에어비엔비를 빌려 이박삼일 내내 홈 쿠킹만 하던 어느 해 가을엔, 동네 슈퍼마켓 와인 코너에 끝도없이 깔린 로제 와인을 보고 우물 안 개구리의 귓등이 뜨뜻해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지난 몇 주 간은 ‘돈나푸가타 루메라’를 지겹게 마셨다. 틈만 나면 ‘라꾸쁘’ 냉장고에 있는 이 와인을 스테인리스 컵에 따라 충전하듯 조금씩 홀짝였다. 손님용으로 튀기고 남은 프렌치 프라이를 곁들이다 보면 어느새 두 잔이었다. 보쌈 고기에 비빔면을 곁들여 먹을 때에도, 방울 토마토만 넣고 파스타를 만들어 먹을 때에도, 혼자서 한우 채끝살을 양껏 구워 먹을 때에도 냉장고로 손을 뻗어 이 로제 와인을 잡았다. 이탈리아 와이너리 피오 체사레 시음 이벤트에 참석해서도, 그 좋다는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를 살짝 옆으로 미뤄두고 네비올로로 만든 로제 와인에 꽂혔다. 소믈리에는 내 잔만 세 번을 내리 채워야 했다.

화이트 와인을 마시는 일이 샌들에 드러난 철 지난 맨발처럼 느껴질 때, 로제 와인은 간절기 카디건처럼 적절한 기분을 선사한다. 레드 와인이 입술부터 기분까지 질척하게 물들일 때 로제는 여전히 산뜻하게 뒤돌아서는 선선함이 있다. 헉 소리나게 비싸고 드넓은 로제와 로제 스파클링 와인의 세계에 눈뜨는 날 이 글을 다시 보면 벽을 뚫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순진하게 행복하다.

글, 사진/ 손기은 (칼럼니스트, 라꾸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