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기분] #5. 바람 불어와 아일라 위스키

피트 향 강한 아일라 위스키를 좋아한다. 가을 바람이 불 때만.

더파크 2019년 09월 20일

오늘이야 말로 날씨가 전부였다. 아니 최근 며칠 간 날씨가 곧 기분이자 능률이자 행복이자 의욕이었다. 인생에 몇 번 없을 일이지만, 무려 일어나면서 웃었다. 요즘은 무신경하게 걷다가도 가을의 바람이 불면 산책용 목줄을 멘 강아지마냥 마음보다 발이 먼저 공중을 달린다. 흐릿하던 햇빛이 서서히 강해지는 순간을 운 좋게 목격하면 그 빛이 다시 약해질 때까지 햇살과 반사를 응시한다.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는 말, 심장에 구멍이 난다는 말, 정신줄을 놓쳤다는 말이 모두 요즘 날씨 앞에서 ‘리터럴리’ 생생하게 체감된다. 유독 9월 말과 10월 초에 이별이 잦았던 터라, 이 맘 때의 인생 곡절을 따지고 들면 눈물과 웃음으로 뒤범벅되고 말지만, 월급날처럼 인자하게 다가오는 가을 날씨 앞에서는 비집고 나오는 미소가 먼저다.

혼자서 ‘시월 초의 공기’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이 맘 때에는 평소 전혀 좋아하지 않던 술이 자꾸 당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느슨하게 채운 공간 ‘라꾸쁘’의 위스키 섹션을 천천히 뜯어보던 예리한 술 애호가들은 종종 이런 말을 남긴다. “아일라 위스키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네요”, “피트한 건 많이 없네요.” 왠지 취향을 들킨 것 같아 멋쩍게 웃지만, 다음날이나 다다음날에 아일라 위스키를 추가 발주하는 일은 없다.

나는 아직도, 피트(Peat)향 가득한 아일라 지역 위스키를 빛도 바람도 들지 않는 지하에서 마시는 기분에 크게 동조할 수 없다. 병원 소독약 냄새, 치위생과의 맛, 정로환을 빨아먹는 기분 등으로 표현되는 강렬한 향의 이 위스키를 실내에서 마시는 일은 왠지 버스 안에 갇혀 도시락을 까먹는 것처럼 갑갑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처럼 뻥 뚫린 풍경을 기대하진 못해도 바람이 머리카락 두세 가닥 정도는 날려줘야 제 맛이 살지 않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일라 위스키를 마셔본 순간을 기억한다. 아마 그 기억 때문에 아일라 위스키에 대한 단단한 편견과 편애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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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켄터키 출장을 끝내고 시카고에서 잠깐 시간을 보낼 때 누군가의 인솔로 빌딩숲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루프톱 바에 가게 됐다. 나는 어렸고, 날은 대낮이었고, 술은 독했다. 켄터키와 시카고의 간극만큼이나 시골쥐인 나와 루프톱 바는 어울리지 않았는데, 그때 에라 모르겠다 아일라 위스키를 주문했다. 음악과 바람은 빌딩과 빌딩 사이에서 증폭됐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는 쉽게 찌그려졌다. 코를 훅 치고 들어오는 피트 향 강한 위스키 한 모금만이 입 안에서 부드러웠다. 당시는 아이폰도 인스타그램도 없었다. 만약 그 순간 아이폰이 내 손에 있었다면 아일라 위스키 잔을 화면 중앙에 놓고 슬로모션으로 수십개의 영상을 찍어 놨을 게 분명하다. 지금 머릿속에 남은 기억의 장면이 그렇다.

껴안고 싶은 완벽한 가을 하늘을 자랑하는 2019년 ‘시월 초의 공기’를 얼굴로 맞으며 라가불린 16년을 떠올렸다. 속 좁은 아일라 위스키 취향을 지녔지만, 피트 향을 상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 병이다. 이 위스키의 피트 향과 단맛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중간 즈음에서 교차된 뒤 뒤에서 단맛 그래프가 훅 치고 올라오는 형태일 테다. 누군가는 이 위스키를 두고 아일라의 특징을 잘 우려낸 곰탕 같다 말하기도 한다.

물컵처럼 넓고 낮은 잔에 라가불린을 따라 향을 퍼뜨린 다음 우동 국물 마시듯이 소리를 내서 한 모금 들이켜고 코로 향을 뿜고 입술을 벌려 또 향을 뿜는다. 아일라 위스키의 강력한 향 때문에 옆 사람과 어깨를 부딪히고 앉아야 하는 실내의 작은 바에서는 이렇게 마실 수가 없다. 적어도 시선이 500미터 너머로 날아가 꽂히는 곳, 저 멀리서부터 이미 시작된 바람의 끝자락이 내 얼굴에 부딪히는 곳, 시야에 걸리는 사람이나 사물이 작게 보이되 그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마셔야 제 맛이다. 집에 베란다가 아니라 발코니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공상하다가, 스코틀랜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 곳곳에 펼쳐지는 강원도에 가서 마셔야겠다는 생각에까지 다다랐다. 바로 구글 캘린더와 구글 맵을 열었다. 참, ‘시월 초의 공기’는 떠미는 힘도 몹시 강하다.

글, 사진/ 손기은(프리랜스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