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s

[술과 기분] #4. 첫 잔은 위스키 사워

내가 통제하는 나만의 밤, 내 눈동자에 건배.

더파크 2019년 08월 30일

“어느 바가 제일 좋았나요?”
“좋은 바 추천해줘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동공보다 뇌가 더 빠르게 지진을 일으킨다. 어디가 좋았더라? 최근에 어느 바를 갔더라? 뭘 마셨지? 좋았나? 온갖 생각이 먼지처럼 떠오르다가 냅다 집어던진 주사위처럼 서울시 지도 위를 데구르르 굴러 버리고 만다. “집에서 가까운 곳이 제일이죠, 뭐”라고 싱겁게 답하고는 찝찝함을 한껏 끌어올려 웃기 일쑤였다. 헤어지고 집에 가는 차 안에서야 추천하고 싶었던 바의 이름이 불현듯 생각나는 뒷북은 늘 따라오지, 암.

바를 추천해달라는 질문에 늘 ‘어버버’로 일관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바를 나오면서 그 바를 기억하고 평가하는 순간보다, 어떤 바가 갑자기 당겨서 계획도 없이 발길을 돌려 그 골목으로 향하는 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특정 바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아마 칵테일이 느낌표처럼 떠오른 순간부터 그 바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까지가 제일 크게 요동칠 것이다. ‘갑자기 그 바가 생각나네’, ‘갑자기 그 바텐더의 칵테일이 마시고 싶네’ 하는 그 순간의 기분이 체력, 금전, 시간, 여유, 그날 입은 옷, 다음 날의 스케줄 등을 모두 차치하게 만든다. 기분의 내비게이션에 자주 찍히는 곳을 꼽는다면 서촌의 참, 이촌동의 헬 카페 스피리터스, 성수동의 올드 나이브스 정도랄까. 순서대로 일터에서 가까운 곳, 일터에서 집에 가는 길에 있는 곳, 집에서 가까운 곳이다. 충동의 선상에 있는 곳. 늘 이런 식이니 “어느 바가 제일 좋았냐”라고 물어오면 기억 회로가 멈춘다. 충동이 없다면 상기도 없다.

기억의 꼬리는 늘 흐릿하지만 그 시작의 초점은 그나마 살아 있다. 첫 칵테일은 늘 정해져 있는 편이다. 한 2초간 고민하는 뉘앙스를 풍기다가 외치는 칵테일 이름은 위스키 사워. 관자놀이가 접힐 듯이 신 칵테일도 싫어하고, 혀가 돌돌 말릴 듯한 단맛도 싫어하고, 탄산에 알코올 도수가 방울방울 흩어지는 경쾌한 칵테일도 싫어하는 내가 나름 합의점을 찾은 칵테일이다.

위스키 사워는 버번위스키를 베이스로 레몬주스, 계란 흰자, 설탕 시럽 약간을 넣고 셰이킹 하는 클래식한 칵테일이다. 계란 흰자의 보들보들한 거품과 잘 다독여진 위스키의 오크 향이 내 어깨를 상하좌우로 흔들어 놓는다. 간혹 “계란 흰자가 들어가는 칵테일인데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바텐더가 물을 때는, “아유, 괜찮죠”라고 답한다.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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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계란 흰자가 들어가지 않은 위스키 사워도 좋다. 알로프트 서울 명동에서 마신, 계란 흰자 없이도 충분히 부드러웠던 한잔은 아직도 주문할 때마다 생각난다. 왜 매번 이 술을 첫 잔으로 시키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유치원 졸업사진에 찍혀 있던, 내가 뽀뽀한 그 남학생이 누구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따져보면 바에서 내 의지로 주문하는 칵테일은 위스키 사워 하나다. 다음 잔부터는 바텐더의 추천으로 간다. 어느 땐 불바르디에로, 밤이 짧을 땐 프렌치 커넥션으로 건너뛴다. 갑자기 위스키 더블을 주문하고 취기를 소용돌이처럼 끌어올리다 화장실에서 두 뺨을 두 손으로 척척 치며 멘탈을 부여잡기도 한다. 바를 나설 때의 기분보다 향할 때의 기분이 또렷한 건 이런 패턴 때문일까? 그래도 시작은 늘 위스키 사워여서 그런지 저녁을 거르고도 속은 늘 든든하고 밤은 충분히 보드라웠다.

위스키 사워라는 소재를 머릿속에 담아둔 순간부터 마음먹은 것이 하나 있었다. 이 글은 모두 다른 바에서, 모두 위스키 사워를 마시면서 써야지. 그렇게 앞부분에는 연남동 연남마실의 위스키 사워에 가미된 팝콘 향이 배어 있고, 중간은 비스타 워커힐 바에서 마신 화려한 가니시의 위스키 사워가 섞여 있다. 노트북을 들고 JW 메리어트 서울 모보 바에 갔다가 글 한 자 쓰지 못하고 위스키 사워만 마시다 오기도 했고, 성수동 올드 나이브스의 단정한 위스키 사워 한 잔은 이 글의 마무리를 담당하고 있다.

모두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팍 치면서 충동적으로 일어나 향했고, 육중한 보물함 뚜껑을 천천히 열 듯 쿵덕이는 마음으로 열고 들어갔던 바였다. 그리고 모두 좋았다. 바에 가고 싶다는 본능을 억누르지 않는, 마시고 싶을 때 확실하게 마시는, 내가 제어하는 나만의 밤이 좋다. 다른 누구를 찾을 것도 없이, 내 눈동자에 위스키 사워로 건배를!

글, 사진 / 손기은 (프리랜스 에디터, ‘라 꾸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