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s

[술과 기분] #3. 소주, 성취감과 패배감 사이

하늘을 뚫고 올라갈 것 같은 날도 땅 속으로 꺼진 것 같은 날도 마시고 싶다. 오늘도, 물론 마시고 싶다.

우성 2019년 08월 16일

주변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며칠 전부터 나는 구성진 소주 타령을 시작했다. 앉았다 일어서면서도 “아이코, 시원한 소주 한잔 당기네”, 휴대폰을 침대에 집어던지면서도 “퓨, 소주 한잔 같이 마실 사람도 없고” 하는 식의 말을 새는 방귀처럼 내뱉는 식이다. 이유랄 것은 없다. 유난히 산이 높았던 원고 마감을 두 개 정도 끝냈고, 날씨가 더워 밤마다 잠이 오지 않았고, 연일 격무로 피곤이 웻수트처럼 온몸에 딱 들러붙었을 뿐.

그 초록 병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사실 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한국인이 책 한 권은 뚝딱 쓸 정도의 두둑한 밑천을 가지고 있을 테다. 유난히 달게 넘어간다 싶은 날에 만들었던 나만 알고 싶은 서사 하나쯤은 다 있지 않나? 다음날 아침 일어나 샤워기 대가리를 깨부수고 싶을 정도의 괴로운 기억도, 박하사탕처럼 유난히 개운했던 술자리의 기억도 모두 소주를 중심으로 얽혀 있다. 서민의 술, 한잔의 위로 같은 고리타분한 수식은 (제발 좀) 치워버리더라도, 소주는 그 자체로 샘솟는 이야깃거리의 원천이 된다.

불현듯, 미치도록 소주가 당기는 원인에 대해 지난 며칠간 잘근잘근 생각을 쪼개 보았다. 와인, 맥주, 위스키, 주정강화 와인, 전통주, 진, 럼…. 술집을 운영하는 덕에 손만 뻗으면 원하는 술을 쉽게 원하는 술을 꺼내 마실 수 있는 요즘 내 상황에서 유일하게 소주만이 손에 닿지 않아서? 하루 걸러 하루 소주를 신나게 마시던 시절, 인맥으로 일상이 북적이던 그때가 그리워서? 부끄러운 기억이든 자지러지게 즐거웠던 기억이든 일상의 새로운 수다거리를 만들고 싶어서? 모두 맞고 모두 틀리기도 하다. 이 원고의 마감을 하루 더 미루면서까지 고민한 결과, 소주에 대한 나의 타는 목마름은 ‘일’과 연결돼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image

소주가 내 머릿속을 꽉 채우는 상황은 크게 두 가지다. 무언가 꽤 근사한 일을 성취했을 때, 그게 대놓고 팡파르를 부를 정도의 업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웃음이 새어 나오는 정도의 뿌듯함이 느껴지는 일을 달성했을 때 소주가 당긴다. 마음을 좀 앓으면서 했던 일, 온갖 신경세포를 다 끌어다 집중했던 일을 마침내 끝냈을 때의 그 개운함을 소주로 만끽하고 싶었다. 희한하게도 몸의 피로와 일의 성취감이 함께 최고조에 이를 때의 소주가 제일 맛있다. 다른 좋은 술보다 소주 한잔이 선명하게 생각난다.

간절히 소주를 찾게 되는 또 다른 상황은 위와 정 반대다. 원하던 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내가 우주의 먼지나 돼지가 된 것 같은 패배감에 맞닥뜨릴 때다. 자존심이 마구 뭉개질 때, 한번 더 하더라도 똑같이 실패하고 말 것 같은 기분일 때, 우주의 기운과 행운이 나를 다 비켜갔다는 걸 확인할 때, 일도 돈도 사람도 다 잃은 것 같을 때. 돈 벌기 위해 일 해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보통은 성취감과 패배감은 쉼 없이 교차되면서, 어느 때엔 동시에도 찾아온다. 퇴근 무렵 소주 한잔 생각 안나는 날이 드물달까. 프리랜서 생활 7개월 차인 나는 조직도 동료도 칭찬도 질책도 성취도 패배도 모두 밋밋한 평온 아래로 가라앉아 있다. 요즘 자꾸 소주가 떠오르는 건 차가운 그 소주 맛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소주 타령 소리는 높아졌지만 아직도 소주다운 소주를 마시지 못했다. 드라마 <유나의 거리> 속 동네 사람들이 마시듯 차지게, 드라마 <눈이 부시게> 속 혜자와 준하처럼 그렁그렁하게 소주잔을 비우고 싶다. 푸르댕댕할 정도로 밝은 불빛 아래, 소주 표면에 형광등이 반사되는 걸 보면서 마시고 싶다. 야외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다 마땅히 젓가락을 놓을 곳이 없어 소주잔 위에 나란히 걸쳐 놓고 싶다. 맥주 글라스에 괜히 소주를 콸콸콸 붓는 걸로 소심한 일탈을 하고 싶다. 소주 한잔 털고 밑반찬 하나 찔끔 집어먹고 싶다. 내 잔에 내가 소주를 따르는 쿨한 내 모습을 보고 싶다. 돼지 부속구이의 기름기를 소주로 바득바득 씻어 내리고 싶다. 나도 모르게 취해서 소주잔에 앞니 쾅 부딪히고 싶다. 앞사람 지루한 이야기를 들으며 파르르 흔들리는 소주의 표면장력을 관찰하고 싶다. ‘소주’와 ‘일’과 ‘혼자 있는 방’이 제각각 정신없이 시끄러운, 환장의 콘트라스트를 즐기고 싶다.

글, 사진 / 손기은(프리랜스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