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기분] #2. 페드로 히메네즈, 혼행의 맛

간장처럼 짙고 조청처럼 달콤한 그 맛. 조금 쓸쓸하지만 한 없이 행복한 셰리 와인 한 잔의 멋.

우성 2019년 08월 01일

다양한 술을 다량으로, 이것저것 따져가며 꼼꼼히 마시지만 좋아하는 술의 첫 번째 기억을 더듬다 보면 언제나 웃음이 난다. ‘이 술, 맞아, 내가 라벨이 예뻐서 처음 마셔봤었지.’ ‘이 술 병이 예뻐서 샀다가 완전히 빠져버렸었지.’ 시작은 늘 좀 원초적이었달까.

그중에선 드물게 술 이름의 발음이 좋아서 관심을 가지게 술도 있다. 스페인의 셰리 와인 중에서도 가장 달콤한 와인인 페드로 히메네즈(Pedro Ximénez)다. 입 안에 착 감기는 맛만큼이나 입술에 주렁주렁 걸리는 그 발음이 좋아 일부러 이 술을 주문한 적도 많다. 줄여서 PX라고 쓰거나 읽는데, 그마저도 멋! “지금 뭐 마셔?” “나, 페드로 히메네즈” 아오, 이 멋!

와인을 양조하는 과정에서 브랜디와 같은 주정을 첨가해 알코올 도수를 끌어올리고 당분을 남기는 독특한 술이 ‘주정강화 와인’이다. 포르투갈의 포트 와인과 마데이라 와인, 스페인의 셰리 와인, 이탈리아의 마르살라 와인 등인데, 주로 아이 주먹만 한 작은 와인잔에 조금씩 따라서 식후주로 즐긴다.

와인이 발효되는 중간 과정에서 주정을 추가해 당분이 알코올로 변하는 것을 멈추게 하는(그래서 단맛이 강한) 포트 와인에 비해 셰리 와인은 발효 과정이 모두 끝난 뒤에 주정을 첨가하기 때문에 드라이한 편이다. 대신 당분을 추가해 크림 셰리를 만들거나 포도 수확 후 이를 바짝 말리고 당분을 끌어올려 페드로 히메네즈 셰리 같은 디저트 와인을 만들기도 한다. 포트 와인에 비하면 셰리 와인은 맛의 레인지가 좀 넓은 편인데, 그래서 좋아하는 이들도 있고, 그 때문에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이들도 있다. 나는 페드로 히메네즈를 대놓고 편애하는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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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히메네즈에 대한 기사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색은 간장처럼 짙고, 맛은 조청처럼 달콤하고 진득하다.” 농축된 단맛이 혀를 물고 늘어지는 술이라 사실 한 번에 100밀리리터 이상 마시기 힘든 술이다. 바텐더나 웨이터가 눈 앞에서 이 술을 따를 때면 어찌나 꾸덕한 지 비디오에 슬로모션을 건 거처럼 액체가 꿀렁꿀렁 쏟아진다. 작은 잔을 두 손가락으로 쥐고 한 입 머금으면 세상의 온갖 견과류와 우주의 온갖 단맛을 끌어 모아 압축한 맛이 밀려들어온다. 알코올 도수 18도 정도의 짱짱한 술이라 주스나 사탕 같은 단맛과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 그렇게 이 술을 반쯤 비울 때면 지극히 주관적인 기분이 하나 따라붙는다. 이 술을 마실 때마다, 그게 서울 시내 한복판이든 우리 집 침대 한 귀퉁이든, 혼자 여행할 때 느끼는 ‘쓸쓸한데 행복한 마음’이 봉긋 솟아오른다.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 지역을 여행할 때는 항상 식후주로 페드로 히메네즈를 한 잔 마시는데, 그래서인지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목에선 항상 페드로 히메네즈 향이 났다. 숨 쉴 때마다 콧구멍에서 그 향이 어른거리고, 단맛에 눌려 있던 취기가 뒤늦게 터지면서 어쩐지 탭댄스라도 추고 싶은 마음이 일렁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불쑥 국제전화를 할 사람도 없고, 마음은 부푸는데 딱히 좋은 멜로디가 떠오르지도 않고, 쓸 데 없이 밤공기는 또 너무 좋고, 다리는 아픈데 잠은 안 오고, 만취 직전이라 골목길은 적당히 촉촉해 보이고…. 외롭지만 충만하고 쓸쓸하지만 행복한 ‘혼행’의 기분은 늘 페드로 히메네즈와 얽혀 있다. 노래를 잘했다면, 아니 내 안의 음악 데이터가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면, ‘홍도야 우지 마라’ 기분으로 한 소절 읊조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늘 답답했다. 술로 기억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쌓이고 쌓였다.

요즘은 서울에서도 페드로 히메네즈라는 단어를 종종 내뱉는다. 서울엔 아직 이 술을 잔으로 마실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지만 위스키 라벨에선 오히려 자주 보인다. 페드로 히메네즈를 숙성시킨 오크통을 가져와 위스키를 숙성하는 증류소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감초와 캐러멜을 섞은 듯한 진한 향을 위스키에 입히고 싶을 때 증류소는 페드로 히메네즈 오크통을 선택한다. 바에서 그런 위스키를 주문할 땐 꼭 ‘페드로 히메네즈’를 붙여서 말한다. “페드로 히메네즈 피니쉬 맞나요?” ‘드’와 ‘로’ 사이에 나만 알 수 있도록 혀를 살짝 굴려주면서. 스페인 골목길의 그 기분을 떠올리면서.

글, 사진 / 손기은(프리랜스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