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s

[술과 기분] #1. 내 손 안의 작은 술

작고 작은 잔을 두 손가락으로만 쥐고 혼자 마시는 이런 기분.

우성 2019년 07월 18일

시작은 소주잔이었을 테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소주잔을 끼우고 훌러덩 입 속으로 털어버리는 그 쾌감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 스물몇 살의 나에게 한 손에 쥔 소주잔은 멋이었다. ”이 정도는 거뜬해”, “늘 마시던 그 느낌 알잖아”, “내 걱정 마 너나 챙겨”, ”오늘 술맛 좋네”. 검지의 반동으로만 한 잔씩 꺾을 때마다 기분은 조금씩 부풀었다.

지난 몇 년 간 술을 주제로 잡지 기사를 만들었다. 하나의 큰 목표가 있었다면 술을 기분으로만 설명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위스키 증류소에선 시골 다람쥐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렸고, 양조장 책임자를 인터뷰할 땐 어떻게든 옹골찬 말을 끌어내려했으며, 새로운 술이 나오면 기존의 술과 무엇이 다른 지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숙성 년수, 양조장 스토리, 칵테일 레시피, 권장 음용법, 판매량 등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간혹 “어떤 술을 가장 좋아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일 때문에 다양하게 마시니까, 다 좋죠, 뭐”라는 아이돌 같은 답을 자주 했던 것도 같다. 내 취향보단 다른 이들의 취향을 편집했다. 내가 다루는 기사엔 소외되는 주종이 없었으면 했다.

일에서 좀 느슨해진 나의 요즘엔 어쩐 일인지 술 앞에 기분만 남았다. 기획을 꾸리고 기사를 만들고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술병을 들여다보는 일보다는 세수 하듯 술을 찾을 때가 많다. 이전처럼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둘러앉아 술을 마시는 시간도 반의 반으로 줄었다. 힙 플레이스를 찾아가 마시거나, 귀한 술을 구해 나눠 마시거나, 뭔가를 축하하기 위해 술잔을 부딪히는 일도 댕강댕강 줄었다.

요즘은 오직 얇디얇은 내 기분만으로 술잔을 든다. TV를 껐을 때 갑자기 찾아오는 진공 같은 조용함, 트위터를 보다 혼자 웃음이 터졌을 때의 어색함이 안주라면 안주다. 춤추듯 하얗게 피어오르는 인센스 스틱 하나만이 유일한 활기인 거실에서, 내 걸음은 느리고 찐득하다. 술은 매일 밤 생각난다. 기분에 따라 주종이 달라질 뿐이다. 오늘은 냉장고에 가득 쌓아 둔 미니 캔 맥주를 꺼내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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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캔에 135밀리리터짜리 미니 맥주캔을 처음 본 건 남대문 수입상가 지하였는데, 최근엔 대형 마트에서도 몇 개의 선택지를 봤다. 워낙 작아 참새처럼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데다 두 손가락으로 잡으면 소주잔을 잡고 고개를 젖히던 그때 그 기분도 슬쩍 떠오른다. 20도짜리 술을 30밀리리터도 안 되게 잔에 따라 놓고선, 세상에 이보다 더 쓴 술은 없는 것 같은 표정은 왜 지었을까? “크어”소리는 옆 포장마차에까지 들릴 정도로 길게 뿜는 걸 즐겼는데, 뒷산에서 “야호!”한 후처럼 개운해지던 기분 때문에 그 습관을 쉽게 고치지 못했다.

누군가는 맥주를 두고 벌컥벌컥 마시는 게 제 맛이라 하고, 누군가는 깨끗하게 샤워하고 나와 마시는 바삭한 맛이 진짜라고 하지만, 나는 맥주조차 한 손에 쏙 쥐고 털어 넣어야 제 맛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전구용 유리로 만든 얇은 우스하리 글라스를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사이즈로 구비해놓고 맥주를 따라 마신다. 맥주만 마시면 다음날 김 빠진 콜라를 뇌에 들이부은 것 같은 숙취에 시달리는 체질이라 생긴 취향 인지도 모르겠다. 만원에 네 캔짜리 맥주를 사놓아도 500밀리리터 한 캔을 하룻밤에 온전히 비운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나랑 같이 살아본 사람이 아니면 못 믿겠지? 그래서였다. 마트에서 미니 맥주캔을 발견하면 훅 떨어지는 가성비 따위는 납작하게 발로 밟아버린 뒤 박스째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일과가 끝날 때마다 한 캔씩 털어 마셨다. 물론 두 손가락만으로.

지난 몇 년간 이어져온 작은 잔 집착증은 이런 기분 위에서 자랐다. 작은 잔에 술을 마실 땐 (웃어넘길 허세는 있을지 몰라도) 불편한 격식과 과장이 사라진다. 작은 잔을 손안에 쥐고 나 홀로 있으면 (고독이 오독오독 씹힐지언정) 어딘가는 포근하고 따뜻해진다. 어떤 술이든 작은 잔에 따라 마시면 내 술이 된다. 한 손에 작은 잔 하나를 쥐고 한 입에 털어 넣거나 조금씩 나눠 마시는 그 순간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전 세계에서 주섬주섬 모은 작은 잔이 이제 찬장 한 칸을 가득 채우고도 넘친다. 지나가다가 손가락 하나 길이를 겨우 넘는 샷 잔, 소형 잔만 보면 지갑을 벌렁 열고 만다. 단맛도 새콤한 맛도 모두 애매모호한 술 리몬첼로나 목구멍을 뜨겁게 긁는 술 그라빠를 좋아하게 된 것도 작디작은 술잔 때문이었다. 리스본 벼룩시장에서 산 작고 싼 잔에 고급 위스키를 따르거나 프랑스 빈티지 가게에서 비싸게 주고 산 크리스털 잔에 달달한 약주를 마시기도 한다. 손가락에 작은 술잔을 쥐고 있는 순간, 나는 술을 조금 더 좋아하게 된다.

글, 사진 / 손기은(프리랜스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