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s

[LITTOR] #1. 그래, 오늘은 소고기를 먹자

일상이 완전히 재편되고 있었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종횡으로 섞여 있었다. 그래서 떠났다. 오늘만큼은 이유가 없었으면 했다. 하루 정도는, 그런 삶도 괜찮다 믿고 싶어서.

우성 2019년 04월 15일

회사 골목에 작고 귀여운 노란색 토요타 프리우스 C가 서 있었다. 촬영과 평가를 위한 시승차, 우리가 만들 영상 콘텐츠의 주인공이었다. 마침내 깨끗하고 맑았던 아침, 이크종과 나는 몇 가지 짐을 챙겨 실으면서 말했다.

“우리 오늘 어디 갈까? 강원도 쪽으로 갈까?”

“그럴까?”

“강원도 왠지 좋잖아? 담백하고, 고속도로도 한적할 거야.”

“좋지.”

여행은 아니었다. 그저 드라이브. 탁 트인 곳에서 촬영해 두면 좋은 영상이 있었지만 꼭 찍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어디서 묵을 일도 아니었다. 가서, 찍고, 끼니를 해결하고, 고속도로 정체가 시작되기 전에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그러니 어디라도 좋았다. 행선지가 끼니의 종류를 결정할 일이었다. 강원도에는 담백하고 좋은 먹거리가 많으니까, 그냥 북쪽 어딘가로 가자는 제안과 수락이었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늘 이런 식이었다. 느슨해 보이지만 원하는 바는 정확했다. 마음이 움직이면 주저 없이 행동했다.

우리가 같이 회사를 차린 지 8개월 정도 됐다. 내가 회사를 그만둔 건 2017년 12월이었다. 나는 그때 12년 동안 내 정체성이었던 직함을 버렸다. 이제 기자님보다 대표님으로 부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누군가는 실장님, 선생님 혹은 작가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냥 ‘우성 씨’라고 부르시면 어때요?” 물었던 적도, 쿨하게 ‘우성’이라고 호칭도 직함도 없이 불렀으면 하고 바랐던 적도 있었지만…. 호칭은 어디까지나 부르는 사람이 편해야 하니까.

2006년에 [경향신문사]에 공채로 입사한 게 사회생활의 시작이었다. 그해 가을엔 [기자, 그 매력적인 이름을 갖다]라는 책을 사서 공들여 읽었다. 사회부 수습 기간에는 새벽마다 경찰서를 4~5군데씩 돌았다. 내 이름으로 지면에 실린 첫 기사는 1면 톱이었다. 대학을 포기한 고3 학생의 인터뷰였다. 아버지는 그 종이 신문을 아직도 갖고 계신다. 대리운전, 인력시장 르포도 썼다. 두루두루 썩 좋은 평을 받았던 기사였는데, “워어따, 기자님이 산 똥은 기자님이 치우셔야지” 하는 식의 협박 전화도 받아봤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제가 아직 수습 기간이라서요. 제가 싼 똥은 아마 데스크에서 치워 주실 거예요. 저희 차장이랑 통화해 보시겠어요?”

이후에는 [레이디경향]을 만들기 시작했다. 꿈꾸던 일이었다. 두 번째 회사는 [GQ]였다. 역시 꿈꾸던 일이었다. 거기서 96권의 [GQ]를 만들었다. 돌아보면 거대하게 한 덩어리로 뭉쳐있는 것 같은 시간, 1년을 열두 달로 나눠 하루하루 완전히 연소하듯 살던 때였다. 각종 스트레스성 질환과 과로 속에서 영원히 프리다이빙하는 느낌으로 지냈던 시간이었지만 한 치의 양보도 후회도 없이 재미있었다. 세 번째 잡지는 [에스콰이어]였다. 18권의 [에스콰이어]를 만들었다. 모조리 상상했던 시간은 아니었지만, 회사를 그만두는 데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았다.

“전 그 용기가 정말 부러워요.”

“아마 전 못할 거예요. 용기가 없거든요.”

“정말 대단하세요,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셨어요?”

회사를 차린 후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절박한 표정으로 비슷한 질문을 했다. 몇몇 매체 인터뷰에서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 하나 같이 답을 구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용기로 퇴사한 게 아니었으니까, 딱히 할 수 있는 대답도 없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제가 회사를 그만둔 건 뭐 대단한 결심을 해서가 아니었어요. 그냥 흐름 같았어요. 할 때가 돼서 한 것 같은 느낌? 그냥 이렇게 자연스럽게.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는 것처럼….”

마주 앉은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 더 절박해졌다. “무슨 그런 스님 같은 말을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퇴사가 유행처럼 소비되는 시대, 나도 분명한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듣다 보면 모두의 삶이 너무 달랐다. 내가 이랬으니까 당신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말에는 아무 단서도 없었다. 우리가 공유하는 건 오로지 절박함 뿐이었다. 그런 채 다 같이 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해 겨울엔 ‘더파크’가 우리의 비상구였다. 이크종과 내가 만들기로 한 미디어 스타트업 회사의 이름. 공원처럼 편하게 누구나 놀러 올 수 있는 미디어가 되고 싶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영상과 팟캐스트를 만들고 카툰을 그린다. 에세이와 기사를 쓰기도 한다. 지금 시대에 생산할 수 있는 모든 형식과 장르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는 팀이라는 뜻이다. 그 모든 형식으로 민음사 고전문학 작품과 각종 책을 리뷰한다. 넷플릭스에 올라오는 다양한 작품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자동차와 술, 각종 소비재도 리뷰하고 있다. 회사 슬로건은 “시간이 소중한 우리를 위한 취향 공동체”로 정했다. 당신의 시간은 소중하니까, 우리가 리뷰하는 작품과 제품으로 알찬 여가를 꾸릴 수 있도록 돕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소중한 시간들은 좀 무자비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 해 겨울이 우리의 마지막 휴가였다. 법인 설립 이후의 속도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일상은 주 단위로 빠르게 재편되기 시작했다. 이크종이 맞닥뜨린 변화는 조금 더 낯설었을 것이다. 12년 동안 프리랜서로 살던 친구의 일상에 회사, 사무실, 출근, 야근, 주말 근무 같은 단어들이 은근히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야근이나 주말근무 같은 단어들은 영원히 침묵했다면 훨씬 더 좋았겠지만, 그걸 피하면 예측할 수 없는 가난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창업 이후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느냐 묻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일의 효율이 엄청나게 높아졌어요. 하루가 이렇게 꽉 차서 가득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예쁘고 진취적인 단어만 골라 말했지만, 실은 눈만 뜨면 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잠자고 요가하고 사랑하는 시간을 빼면 모든 게 일이었다. 잡지를 만들 때도 양상은 비슷했지만 일의 양, 집중의 농도와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근거가 분명한 긍정이기도 했다. 일의 양은 몇 배로 늘었지만 회사에서 받았던 그 무용한 스트레스의 95퍼센트는 사라졌으니까. 최소한 누가 내 상투를 쥐고 흔드는 것 같았던 그 무례한 일상에 휩쓸리지는 않게 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퇴사는 엄연하고 냉정한 선택이었다. 예정돼 있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미래와 불투명하지만 한 번 만들어보고 싶은 시간 사이의 결정. 우리는 무슨 답을 얻은 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천천히 우리의 둑을 쌓고 있는 셈이었다. 연봉은 반으로 줄었고 기댈 곳도 사라졌지만. 누구도 우리의 4대 보험을 대신 계산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정부 기관이 보낸 고지서를 받고 나서야 겨우 알았다 해도. 하지만 이 둑이 조금씩 단단해지면, 그 안에 썩 괜찮은 저수지가 생길 거라는 기대와 믿음으로 기꺼이 하루하루를 버텼다.

“올여름 진짜 길었다, 그치?”

“정신없었지.”

“그래도 어찌어찌해냈네?”

“그러니까.”

어쩌면, 이 담담한 드라이브는 우리만 아는 작은 성취였다. 올여름은 버텨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조차 희박한 상태로 시작한 계절이었다. 달력에 적혀있는 일정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미팅과 미팅 사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촘촘하게 섞여서 박혀 있었다. 그 사이로 새로운 일들이 또 치고 들어왔다. 서울의 온도가 섭씨 40도에 육박하던 날, 우리는 망연한 채 첫 날을 생각했다. 그래도 그날만큼 비장해질 필요는 없게 됐으니까 어떻게는 나아지고 있는 중이라고 서로 위로했다.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했던 날, 나는 이크종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 통장에 현금 얼마 있어?”

“왜애?”

“우리, 한 1년 수입 없이 버틴다 생각하고 한 번 해볼까?”

아무 기약도 없었을 때, 내 친구 이크종은 왜 그렇게 순순히 OK 했을까? 아직도 궁금하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때 우리가 했던 예측은 모조리 빗나갔다. 현실은 현실이었고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경험으로 깨우친 귀한 교훈이었다. 하긴, 그때는 우리가 그렇게 많이 싸울 거라는 예측도 못했으니까.

우리는 참 많이 싸우고, 상처를 주고받고, 모진 말을 되로 주고 말로 받으면서 몇 개월을 버텼다. 모든 게 새로워서 예민한 와중에도 일은 착실하게 했다. 덕분에 사무실 월세는 한 번도 밀리지 않았다. 어쩌면 부부 같았다. 사소하게 다투면서도 가정은 알차게 꾸리고, 지분으로 묶여 있으니까 헤어지지도 못하는.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 알게 된 것들, 다 알면서도 하지 않은 이야기들, 서로 기꺼이 편해질 수 있는 거리감을 세심하게 가늠했던 시간들이 지금의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 거 아닐까? 혹시, 둘 중 한 명이라도 결혼한 상태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시작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의 용기를 부러워했던 사람들의 절반은 결혼한 상태였다. 너무 하고 싶지만 아내 혹은 남편과 자식이 있어서 그럴 수 없다는 현실 앞에, 그들이 부러워했던 것은 혹시 용기가 아니라 자유 아니었을까? 하지만 결혼이 도전해야 마땅한 미래까지 볼모로 잡은 계약이라면 두 사람은 내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럴 때 결혼은 무참한 핑계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겪고 있는 모든 답답함과 스트레스, 불안과 욕구불만의 원인을 모두 결혼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나쁜 습관, 해보지 않아서 모르는 일들, 모두에게는 모두의 사정이 있다는 엄연한 사실들.

하지만 여름은 끝났고, 지금 우리한테 중요한 건 그들의 결혼이 아니었다. 그들의 용기, 자유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모처럼 여유로운 날. 중요한 건 오로지 좋은 끼니였다. 이크종이 물었다.

“우성아, 우리 오늘 뭐 찍어야 돼?”

“오늘? 엔진룸이랑... 엔진룸만 찍으면 될 것 같은데? 뭐 다른 것도 찍어 둘까?”

“그랬어? 찍을 게 그렇게 많지는 않구나, 오늘?”

“응, 사실 강원도까지 안 와도 되는 날이긴 했어. 경기도 어디라도 괜찮긴 했는데.”

“그랬겠네.”

“근데 괜히 멀리 가고 싶은 날 있잖아? 이유 없이. 오늘 우리 모처럼 급한 일 없는 날이라서. 내일부터 또 바빠질 테니까. 그치?”

“하긴 그래.”

“가서 맛있는 거 먹자. 고기 먹자, 소고기.”

우리는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도 입력하지 않고 고속도로에 오른 참이었다. 그러다 강원도 느낌이 날 때 적당히 빠질 생각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횡성’이라고 쓰여있는 이정표를 따라 나갔다. 적당히 한적한 도로에서 필요한 만큼의 촬영을 하고, 세상 수상해 보이는 대학교 캠퍼스를 구경했다. 바람이 건조해서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운동장에선 동네 아저씨들이 연 축구 대회가 한창이었다.

우리는 느지막이 앉아서 차돌박이와 등심, 안창살과 제비추리를 차례로 구워 먹었다. 친구랑 둘이 마주 앉아서 소고기를 부위별로 굽는 마음에는 절박함이 없었다. 넉넉하게 배가 불러 밖으로 나왔을 땐 다른 걱정도 다 사라져 있었다. 해는 아주 조금만 기울어 있었다. 일부러 텅 비운 하루, 거짓말처럼 선선해진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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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우성
그림/ 이크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