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s

요가를 못하게 된 몸

3개월 정도였을까? 내 몸은 천천히 화석이 되는 것 같았다.

우성 2018년 08월 30일

한갓진 생일을 막 지난 날이었다. 이튿날은 설이었다. 모든 생일이 북적거려야 제 맛인 건 아니니까, 절반의 외로움과 절반의 한적함을 내내 즐기던 연휴였다. 떠나고 멀어지면서, 나를 둘러싼 거의 모든 기둥이 사라진 것 같은 겨울이었다. 퇴사하고 이별하고 새로운 일을 설계하던 시간이 숨가쁘게 흘렀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던 즈음이었다.

퇴사하면 쉴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같은 건 이제 거짓말이라는 걸 안다. 막연하게, 내가 나를 잘 몰랐던 시기에나 할 수 있었던 생각이었다. 지금은 안다. 나는 잘 못 쉬는 사람, 가만히 앉아서도 뭘 생각하거나 쓰는 사람이라는 걸. 혹은 그렇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걸 제 때에 쏟아내지 않으면 혼자서 부채 의식에 시달렸다. 일이 많아서 생기는 스트레스보다 할 수 있는 일을 제 때 못해서 느끼는 스트레스가 훨씬 컸다. 출근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하루를 꽉 채워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니 설 연휴는 달고 달아야 했지만.

겨울이 한 풀 꺾인 것 같았던 2월 중순, 햇빛이 유난히 밝았던 날이었다. 나는 이른 봄을 맞이하 듯이 산책하고 싶었다. 느슨한 약속처럼, 혼자서라도 천천히 걷고 싶었다. 일부러 그늘을 피해 걸었다. 햇빛은 겨울에도 따뜻하다는 걸 새삼 느끼고 싶었다. 천천히 걸어가 마트에서 먹을 걸 샀다. 공원에 앉아 음악을 듣다가 뭘 좀 쓰기도 했다. 완벽에 가까운 오후였다. 내가 원하는 흐름대로 행동하는 일이야말로 휴식의 절정이니까. 나는 완전히 충만한 채 새해를 맞을 준비를 끝낸 것 같았다.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식사를 마치고 나면 다시 멋진 하루가 시작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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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날, 집에 돌아가는 길엔 왜 그 길로 걸었을까? 자동차 매장에 있던 그 차들은 왜 그렇게 유심히 보고 싶었을까? 내 시선이 왼쪽으로 고정돼 있을 때 몸이 오른쪽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들고 있던 비닐봉지가 떨어지면서 그 안에 있던 내용물도 다 쏟아졌다. 우유니 햇반이니 하는 것들이 바닥을 구르는 장면이 내 눈에 슬로 모션처럼 보일 때, 내 몸은 다시 반대쪽으로 크게 뛰어올랐다. 무슨 스프링처럼, 오른쪽으로 휘청인만큼 왼쪽으로 생긴 반동이었다. 이제 균형을 잡을 차례였다. 오른발을 땅에 딛었는데 그대로 다시 휘청이고 말았다. 오른발에 힘을 실을 수가 없었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기 직전에 오른손으로 땅을 짚으면서 버텼다. 더 이상 서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오른발을 들고 깽깽이로 뛰어 옆 건물 화단에 앉았다.

“아…”

너무 아파서 소리도 안 나왔다. 나는 ’헙!’ 하고 멈춘 숨으로 크게 휘청이다가, 다시 튀어 올랐다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한 발로 뛰어 앉을 곳을 찾은 거였다. 숨도 못 쉬고 몸을 웅크리면서 고통을 꾹 참았다. 심하게 욱신거리는 오른쪽 발목을 두 손으로 쥐고 다시 호흡을 찾기까지 시간을 얼마나 흘렀을까? 아마 몇 초, 혹은 1분 남짓? 이마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명절 연휴의 골목엔 아무도 없었다. 민망하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어서 불행이었다. 돌아보니 내가 휘청거렸던 부분의 도로가 푹 꺼져있었다. 꺼진 땅의 경계를 잘못 디딘 오른발목이 바깥쪽 푹 꺼지면서 심하게 꺾인 거였다.

다시 깽깽이로 그 골목에 흘린 것들을 수습해 비닐봉지에 담았다. 운동화 끈을 평소보다 강하게 조였다. 일단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냥 좀 삔 거겠지’ 생각했다. 집까지 5분, 절룩거려야 하니까 10분. 그렇게 생각하고 걷기 시작했다. 집에만 가면 다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발목 삐는 게 처음도 아니니까, 얼음을 얹어놓고 가만히 있다 보면 가라앉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게 이불을 덮고 소파에 누워서 잠깐, 아주 깊이 잠들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기절하듯 그렇게 됐다. 회복을 위한 잠이었다. 어렸을 땐 다 그랬던 것 같았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좋아져 있었다. 속상했던 마음도 가라앉아 있었다. 왜 울었는지는 생각도 안 났다. 그렇게 까무룩 잠들었다 깨면 대체로 배가 고팠는데, 마침 엄마가 준비해준 간식을 먹고 나면 다시 여지없이 좋은날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어리지 않고, 어떤 불행은 양보를 몰랐다. 발목은 한껏 나빠져 있었다. 파랗고 빨갛게 부어있었다. 아예 바닥을 디딜 수가 없었다. 설날 아침엔 아버지와 시골에 가야 했는데, 아버지께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그냥 쉬어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래도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절룩거리면서 끼니를 챙겨먹고 소파에 모로 누웠다. 넷플릭스 목록을 뒤적이다가 책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보낸 밤이었다. 다시, 길게 한 숨 자고 일어나면 거짓말처럼 회복되길 바라면서 잠들었다.

하지만 설날 저녁엔 응급실에 가야 했다. 발목은 더 부어있었다. 이제 무슨 몽둥이 같았다. 만져보면 딱딱하기까지 해서 두려웠다. 어머니랑 누나가 떡국을 싸와서 같이 먹고, 누나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에 갔더니 “심하다, 왜 이제 오셨느냐”는 말을 들었다.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반깁스를 하고 바닥이 두꺼운 고무 신발을 받았다.

“다행히 부러지진 않았어요. 인대를 심하게 다친 거예요. 움직이시면 안 돼요. 안 움직여야 나아요.”

그 길로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와 누나를 안심 시키고 돌아와 혼자가 되었다. 두 달 가까이 이어졌던 강제 요양의 시작이었다. 집 밖에서 하던 모든 일을 멈춰야 했다. 움직이지 않는 게 내 일이었다. 하루가 하릴없이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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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쪽으로 난 창에서 해가 뜨는 걸 느끼면서 깼다가, 북서쪽으로 난 거실 창에서 해가 떨어지는 걸 그대로 지켜봤다. 나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배가 고프면 절룩거리면서 밥을 챙겨 먹었다. 직장에 소속돼 있지 않은 사람의 전화기는 아주 가끔만 울렸다. 거실에는 그 동안 못 읽었던 책들이 쌓여갔다. 손이 닿는 곳에 늘어놓고 잡히는 대로 골라 읽었다.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안 했으니까, 가끔 전화가 오면 종일 잠겨있던 목을 가다듬어야 했다. 강제 휴식, 아프니까 쉴 수 있었다. 길게 떨어지는 겨울 햇빛을 보면서 저녁 식사를 하고 진통제까지 챙겨 먹고 나선 ‘썩 나쁘지 않아, 통증만 없다면’ 혼자 웃으면서 생각하다 나른하게 잠드는 하루의 연속이었다. 깨면 다시 아침이었다.

2주 후에 석고 깁스를 풀었을 때도 움직일 순 없었다. 한약을 먹고 침을 맞으면서 다시 한 달 반 동안 플라스틱 깁스를 해야 했다. 캐스트를 풀고 나서도 자유롭진 않았다. 발목이 돌아가지 않으니 양반다리로 앉을 수도 없었다. 잘 땐 베개 위에 발목을 얹어놓고 잤다. 무의식 중에 기지개를 켤 때마다 벼락처럼 아팠다. 수련을 못하니 몸은 퇴화하는 것 같았다. 앉아서 할 수 있는 자세로 몸을 풀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근육들이 제 멋대로 수축하고 이완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화석처럼 굳어버리면 어쩌지? 다시 솜사탕처럼 약해지면? 시간이 나를 배신하는 것 같았지만… 그 와중에 내 몸에선 좀 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단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냥 내 몸의 형태로서, 거기 영원히 붙어있을 것 같은 살이었다. 지도자 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수련하면서 붙은 근육이 없지 않았지만, 물이 기름을 밀어내는 것처럼 부피가 커지는 식이었다. 그때 만났던 친구들은 “너 요가 말고 웨이트 트레이닝 하는 사람 같아” 놀라면서 말했다. 그게 줄어들고 제 자리를 찾으면서 피부색도 밝아졌다. 가끔 구호물자를 챙겨 집에 오시던 어머니께서 “얼굴이 밝아졌다?” 하실 땐 “빛을 못 봐서 그래요” 눙치고 말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쉬는 동안의 회복은 발목에 한정된 게 아니었다. 몸 전체가 리셋을 준비하고 있었다. 발목을 삐었던 그 날 이후로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모든 끼니는 집밥이었다. 침과 한약을 병행하면서는 밀가루도 끊었으니까. 일종의 정화 과정이었을까? 몸은 착실하게 생활을 반영하고 있었다.

몸이 맑아지니까 입맛도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혼자 집을 나서 찾아간 동네 카페에선 거의 처음으로 커피의 맛을 느낀 것 같았다. 아주 평범하고, 대체로 심심하다고 느꼈던 프랜차이즈 카페의 아메리카노에서 향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원래도 둔한 편은 아니었는데, 이건 좀 이상한 경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 두기 이전의 커피는 그저 생존이었다. 맛을 위한 음료가 아니었다. 10년 이상 그랬다. 10년의 관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안 맞아서 걸어 두기만 했던 바지와 셔츠도 맞기 시작했다. 하나를 입어보곤 신기해서 몇 벌을 더 입어봤다. 우연이 아니었다. 그 바지와 저 셔츠가 맞았던 몇 년 전으로 몸이 돌아가고 있었다. 주량도 줄었다. 몇 개월이 지났을 때, 회복 후 처음 마신 맥주로는 딱 한 두 잔 만에 뿌듯하게 좋은 기분이 됐다.

“맥주 맛이 이런 거였어? 맛있는 술이었네, 맥주!”

마주 앉은 친구는 신기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표정도 많이 좋아졌어. 뭔가 평화로워 졌어. 그냥 다친 게 아니었나 봐. 회사 그만두고 새로운 일 시작하기 전에 억지로라도 쉬라고 그렇게 아팠나 봐. 너 아프지 않으면 쉬지도 못했던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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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랬던 걸까? 나는 왜 그렇게 무리했던 걸까? 무슨 의무감처럼 마셨던 그 술들은 다 무슨 의미였을까? 다 같이 취해서 한껏 웃을 땐 여지 없이 행복했지만… 한약을 지어주면서 “꽤 힘들었을 텐데 괜찮으셨어요?” 묻는 선생님한테 “제가 요가 수련을 하는데요” 했을 때 선생님 표정은 아직도 안 잊혀진다.

“요가라도 하니까 이 정도였던 거예요. 가까스로 지탱하고 계셨네요. 일단 약을 좀 드셔보세요. 좋아질 거예요.”

약봉지를 받아 들고 집까지 절룩절룩 걸어가던 오후와 친구의 말이 자꾸만 겹쳤다. 몸은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망가져 있었다. 나아질 일도 없이 내달리던 일상이었다. 그러다 모든 일정이 멈췄을 때, 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걸까? 몸이 천천히 회복되는 걸 바라보면서 내 조바심도 같이 잦아들었다. 평생 같이 할 몸, 조금 더 아껴주자고 이제야 생각하게 됐다. 평생 할 요가 수련, 몇 개월 쉬어 간다고 스스로 보채지 말자고도 다짐했다.

몇 개월 후, 다시 수련을 시작했을 땐 처음처럼 두려웠다. 늘 하던 자세들이 처음 만난 것처럼 새침하게 굴었다. 어떤 자세는 아파서 불가능했다. 하지만 첫 날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첫 날처럼 말씀하셨다.

“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머물러 계세요.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천천히, 달래듯,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 하는 일. 내 통제를 벗어난 어떤 일 때문에 좌절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일. 요가가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기꺼이 배우고 있었다. 발목의 움직임은 수련을 거듭할 때마다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처음 딛는 걸음도 아프지 않게 됐을 무렵, 거의 4개월만에 빈야사 수련을 마치고 나서는 선생님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괜찮았어요? 발목, 힘들지 않았어요?”

“너무 좋았어요. 오늘 요가 처음 수련한 날 같았어요.”

선생님은 의아한 표정으로, 하지만 한껏 웃으면서 나를 안아주셨다. 발목은 아직 완벽하지 않다. 오래 걸을 수 있지만 조깅은 힘든 상태. 회복했다고 생각한 후에도 두어 번은 더 습관처럼 삐었다. 하지만 회복하고 있다. 동시에 강해지고 있다. 그것만은 정확하게 느낄 수 있게 됐다. 이제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요가 수련도, 새로 시작한 일도,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는 일까지도.

글/ 정우성
그림/ 이크종